학원별곡 7 - 너의 추억, 나의 악몽

“ 어 ? 아저씨 !”

“ 아니 , 넌 ...”

학부모 한 분이 나를 기다린다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고 낯익은 얼굴이 화들짝 놀란다 . 학교 교사가 되기 전 , 대학 2 학년 때 운영하던 후암동 화실의 제자였다 . 그런데 왜 하필 ‘ 아저씨 ’ 인지 내력부터 밝히자면 이렇다 .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내 로망이자 꿈이었던 서울예술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원하지도 않던  상고에 입학해 3년 내내 거의 모든 수업을 빼먹고 땡땡이만 치던 끝에 1975년에 전교 꼴찌로 졸업했다. 졸업 후 마땅히 갈 곳 없이 이 회사 한 달, 저 회사 한 주 식으로 취직하고, 때려치우고, 잘리기를 거듭하며 빈둥거리다가 5월 16일(5.16이라 뚜렷이 기억)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미래의 나를 발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하고 우선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대 진학(정확히 말해서 진학이 아닌 응시 자체가 목적이었음)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여 그 해 가을 예비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예비고사를 마친 이후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안국동에 소재한 화실에 다니게 되었는데 , 그 화실은 30 여 명에 가까운 학생 전원이 여학생이었고 , 나 혼자 남자인데다 재수생이었다 . 당연히 여학생들은 한 송이 요염한 꽃인 나를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무척 애간장을 태우는 눈치들이었다 . 나만의 착각이었나 ?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토끼를 닮은 연씨 성을 가진 귀여운 여고 2 학년 학생이 나를 처음으로 불렀는데 , 그 호칭이 바로 ‘ 아저씨 ’ 였다 . 그 뒤로 화실의 모든 여학생이 그 호칭으로 나를 불렀음은 물론이다 . 당시 학생 중의 한 명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 학부모 ( 정확히 말해서 학생의 누나이지만 학부모 자격으로 나를 찾은 것이다 )’ 이고 ,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후암동에 화실을 차리자 내게 배우겠다고 따라온 학생이었던 것이다 .

“ 정말 세상 좁구나 . 이렇게도 너를 만나는구나 .”

“ 저도 동생한테 미술선생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쩐지 아저씨가 연상되긴 했지만 정말 아저씬 줄은 꿈도 못 꿨어요 .”

“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다방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 .”

학교 근처 다방에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 학부모 ’ 가 말했다 .

“ 정말 아저씨 화실 다닐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

“ 재미 ? 그래 , 뭐가 그리 재미있었니 ? 넌 언제나 울상이었잖아 ?”

‘ 학부모 ’ 는 정말 내 속을 많이도 뒤집어 놓았었다 . 어디선가 조금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면 화실에 와서 그림은 한 장도 안 그리고 하루 종일 잔뜩 성난 표정을 하고 앉아 화실 분위기를 완전히 잡쳐놓기 일쑤였고 , 누군가 달래기라도 했다가는 기어이 그 애꿎은 아이와 대판 싸우고 울고 불고 ... 난리도 아니었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 재미있었다 ’ 는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

“ 기억나세요 ? 라면 들고 뛰던 거 ...”

“ 라면 들고 뛰어 ? 아 ...”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

학비며 생활비를 모두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가난뱅이 대학생인 나는 돈벌이를 위해 빚을 얻어 화실이랍시고 차리긴 했는데 수입은 영 시원찮았다 . 학생은 많았지만 거의 모두가 수업료를 안 냈다 . 화실의 모든 학생을 장학생으로 만든 주범이 바로 그 ‘ 학부모 ’ 였는데 , 잘 사는 집의 딸인 그 ‘ 학부모 ’ 가 돈을 내지 않는 이유는 그저 자신이 나를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 알긴 뭘 알아 ? 친척도 아니고 전에 내가 배우러 다니던 화실에서 같은 학생이었을 뿐인걸 . 그런데 그 학생이 데려온 학생은 자기 친구가 공짜이니 자신도 당연히 공짜 , 이런 식이었다 . 어느덧 아이들 사이에서는 ‘ 우리 선생님은 돈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초월하신 분이야 .’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 떠돌았다 . 그 아이들 눈에는 내가 얼마나 돈을 밝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

봉천동 자취방에서 일어나면 아침은 거른 채 전날 화실 학생에게 꾼 ( 사실은 강탈 ) 버스비로 학교에 갔다가 과 친구에게 버스비 또 빌려 ( 역시 강탈 ) 화실에 가고 , 화실에서 동전 하나 또 빌려서 하루의 유일한 식사인 라면 한 개를 사 끓여먹고 , 또 돈 빌려서 ( 또 다시 강탈 ) 자취방에 돌아오고 ... 약간의 바리에이션을 제외하면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던 것이다 .

그 날도 아이들에게 강탈한 동전으로 라면을 끓여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

“ 아저씨 , 같이 먹어요 .”

‘ 학부모 ’ 가 나무젓가락을 쪼개 들고 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 그 날의 유일한 식사가 절반으로 줄어들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 하지만 명색이 선생인 내가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 사랑스런 제자 ’ 에게 ‘ 안 돼 !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 이럴 수는 없는 노릇 ,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굴렸다 .

“ 나 잡으면 같이 먹 ~ 지 !”

나는 라면 냄비를 들고 일어나 내게 달려드는 ‘ 학부모 ’ 를 피했다 . 이 모든 동작은 누가 봐도 어디까지나 ‘ 장난 ’ 내지는 ‘ 놀이 ’ 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적당한 표정관리와 장난스러운 동작이 성패의 열쇠를 쥔 노하우였다 . 일차 공격에 실패한 ‘ 학부모 ’ 는 재차 공격을 시도했고 , 나는 라면을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가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 ‘ 학부모 ’ 도 포기하지 않고 깔깔 웃으면서 쫓아왔다 .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고 우아한 동작으로 골목을 달리면서 먹는 라면은 맛이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었다 . 가끔 즐거움을 가장한 유쾌한 웃음을 날리면서 꾸역꾸역 라면을 먹었다 . 결국 최소한의 라면 건더기와 국물 조금을 남겨 ‘ 학부모 ’ 에게 넘김으로서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데 성공했다 .

그 비참하고 치사하고 씁쓸한 기억의 실상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또 다시 치사한 짓이라는 생각에 에둘러 말했다 .

“ 그래 , 그게 재미있었구나 ... 그런데 말이다 , 누군가의 추억이 다른 사람에겐 악몽이 될 수도 있는 거란다 .”

아마 그 때 라면을 빼앗아 먹으려는 학생이 지지리도 속을 썩이며 미운 짓만 골라 하던 ‘ 학부모 ’ 가 아닌 다른 사랑스런 제자였다면 그렇게 라면 냄비를 들고 골목을 뛰는 추태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 역시 나는 학생을 편애하는 모자란 선생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