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별곡 6 - 봉투의 향기

26년 전 어느 가을날 , 한 달쯤 전부터 계속 나를 찾던 전화라며 아내가 건네준 수화기에서 한 여학생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 그래 , XX 구나 . 반갑다 . 그래 , 웬일이지 ?”

“어?  선생님 , 제 이름 기억하세요 ?”

내가 금방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자 학생의 목소리도 기분 좋게 반 음 정도 올라갔다 .

29 년 전 , 그러니까 그 아이가 1 학년이었을 때 한 학기동안 그 아이가 속한 실기반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 열 서너 명의 그 실기반 아이들 중에 그 아이는 유독 내 주의를 끌었다 . 항상 고요하게 웃는 얼굴에 인사를 아주 잘 했고 , 친구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이 ...... 수업시간이라야 주 1 회 , 세 시간이 전부이기 때문에 반년이 다 지나도록 아이들 이름도 외우지 못한 채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아이의 기억은 너무 선명했다 .

“ 선생님 , 혹시 저 소묘보충수업 해 주실 수 있으세요 ?”

“ 뭐 ? 소묘보충수업 ? 난 삼학년 담당이 아닌데 ?”

“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

“ 보충수업을 하지 않으시는 다른 삼학년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잖아 ?”

“ 다른 선생님들은 싫어요 . 선생님께 받고 싶은데요 ?”

“ 그 ...... 래 ......? 하긴 뭐, 내가 워낙 잘 생기긴 했지 ......”

당장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새삼스럽고 뻔한 진리를 말하고는 잠시 말을 끊고 있었다 . 당시 학교에서는 삼학년 입시생들을 위해 정규 실기 수업 외에 학생들이 원하는 실기강사를 지명해서 주당 2 회씩 매회 네 시간의 실기보충 제도를 시행하던 중이었다 . 그 제도는 외부의 미술학원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갈 경우 입시지도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물론 , 학부모들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마련한 제도였다 . 그러나 최저 월 백만 원 이상으로 책정된 강사료를 보장하기 위해 희망 학생이 5 명 미만일 경우 학생 1 인당 부담이 20 만원을 넘기 때문에 폐강되도록 제도화시켰으며 , 수업 받기를 희망하는 강사도 삼학년 담당 강사로 국한되어 있었다 . 당시 나는 미술 선생은 좋아도 입시 선생은 싫다며 몇 년간 삼학년 수업을 맡지 않았던 터라 보충수업을 하지 않고 있기도 했지만 , 무엇보다 입시가 불과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에서 지도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예능 실기의 특성상 입시생을 맡는다는 것은 학생에게 모험이기 때문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 사실은 학생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굳이 내게 배우겠다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 내가 한참을 딱 부러지는 말을 못하고 있자 조금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선생님 , 곤란하세요 ?”

“ 글쎄 ...... 어떻게 해야 하지 ? 그런데 왜 꼭 내게 배우고 싶은 거니 ?”

“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좋아서죠 . 전 3년동안 여러 선생님 수업을 들었지만 수업시간에 하신 선생님 말씀들만 기억나요.  어려우세요 ?”

“ 근데 왜 이제 와서 내게 배우려고 하니 ? 이제 입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

“ 사실은 학기 초에 보충수업 희망 선생님으로 선생님을 써냈는데 신청자 미달로 못했어요 .”

“ 당연하지 . 난 삼학년 담당이 아니니 애들이 써 낼 리가 없지 . 그래서 그동안 보충수업 안 했었니 ?”

“ 네 .”

그러면서 지금까지 화실도 안 다녔고 앞으로도 다니지 않을 것이며 , 내가 거절하면 혼자 그릴 것이라며 배수의 진을 쳤다 . 참으로 난감했다 .

“ 그래 ?...... 어떻게 해야 하나 ...... 음 ......”

“ 선생님 , 어떻게 좀 안 되세요 ?”

그 아이의 목소리가 간절한 투로 바뀌었다 .

“ 정말 꼭 내게 배우고 싶니 ?”

“ 네 .”

너무나 단호한 대답이었다 .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했다 .

“ 가만 있자 ...... 내가 알기로는 보충수업이 교장선생님 주관으로 실시되고 있는 것 같으니 내 마음대로 대답을 못 하겠구나 . 어떡하지 ?”

“ 방법이 없을까요 ?”

“ 음 ...... 내 말 잘 들어라 . 나는 학교라는 조직에 근무하는 직원이다 . 그런 동시에 너희들이 배우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가르쳐야 하는 선생이기도 하고 ...... 그러니까 학교가 정해놓은 방침에 거슬리는 결정은 내 독단으로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배우기를 원하는데 학교 방침만 운운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 그렇지 ?”

“ 네 .”

“ 그럼 이제 대답을 하마 . 일단 내 개인적으로는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사실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무조건 들어주고 싶다 . 학교에서 안 된다면 너희 집에서라도 해 주고 싶다 . 그렇지만 일단 내일 미술부장님께 말씀드려서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정식으로 보충수업을 해야 하는 것이 순서다 . 삼학년 담당 선생님들 중에서도 원하는 학생들이 없어서 보충수업을 못 하시는 선생님들도 있는데 삼학년 담당도 아닌 내가 끼어든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 이것저것 다 제쳐놓고 내가 너희들 선생인 이상 우선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방법만 생각해 보자 .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 그래 , 그럼 그렇게 하자 ’ 이지만 그 말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을 너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

“ 네 , 선생님 .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그 아이의 목소리는 금세 활기가 넘쳤다 .

다음 날 ,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미술부장 선생님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

“ 최저 강사료가 백만 원인데 , 그럼 학생 부담이 과합니다 . 다른 반은 보통 학생 한 명당 십 오만원 내지 많아야 이십 만원을 넘지 않거든요 . 사교육비 경감이 보충수업의 중요한 취지이기 때문에 얼른 결정을 내릴 수가 없군요 .”

“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 전 단 돈 십 만원만 받아도 수업을 할 수 있으니까 그냥 형편대로 내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 저도 많이 받으면 좋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 아닙니까 ?”

“ 그건 안 됩니다 . 보충수업은 어디까지나 교장선생님의 명을 받아 학교에서 정식으로 실시하는 것인 만큼 선생님하고 학생들이 적당히 금액을 정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물론 선생님과 학생들간에 합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라도 학교에서 학생들 사정과 선생님의 의견을 감안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합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기 위해 비싼 수업료를 감당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 그 아이 생각이 그래도 좋다면 물론 당연히 실기반을 개설할 수 있습니다 .”

“ 그럼 부장 선생님께서 한 번 만나셔서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결정을 해 주시겠습니까 ?”

“ 그럽시다 . 그 아이를 저한테 보내주세요 .”

한 시간쯤 후 다시 나를 찾아온 그 아이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가 잘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수업 시간은 보충수업에 규정된 주 2 회 4 시간씩 주당 총 8 시간이 아닌 일요일까지 포함한 매일 아침 9 시부터 밤 11 시까지 , 수업료는 최저 강사료의 5 분의 1 인 20 만원으로 결정했다 . 시간은 12 배가 넘고 강사료는 5 분의 1 이니 시중가의 60 분의 1 도 안 되는 파격왕창세일인 셈이었다 . 그 학생은 처음에는 내 결정에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어려운 집안사정을 뻔히 아는 내가 박박 우겨서 그리 했다 .

“ 선생님 , 그렇게 하시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안 돼요 . 선생님 시간을 너무 빼앗잖아요 .”

“ 넌 너에게 허락된 하루 24 시간이 모두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니 ?”

“ 그건 아니지만 ...... 그래도요 ......”

“ 나도 나의 하루 24 시간이 모두 내 것이 아니다 . 지금부터 입시 끝날 때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의 것이고 , 난 그 시간을 너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니 방해하지 마라 .”

그렇게 1 인을 위한 기묘한 보충수업이 시작됐고 , 2 개월 후 그 학생은 1 차 지원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 그와 동시에 학교의 모든 보충실기는 공식적으로 마감되었다 . 그 학생은 내게 너무 미안하다며 2 차 시험 준비는 혼자 하겠다고 말했다 .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또 다시 박박 우겨서 2 차 시험 준비를 위한 보충수업을 한달간 속개하기로 했다 . 아울러 더 이상의 수업료는 받지 않기로 했다 . 학교 내의 보충실기가 공식적으로 모두 종료된 마당에 단돈 한 푼을 받아도 누군가 불법과외로 몰아 문제를 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방학이라 텅 빈 학교에서 한달간의 보충수업도 끝나고 그 아이는 2 차 시험에 합격했다 . 열흘 쯤 후 , 그 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찾아왔다 . 학원별곡 첫 번째 글에 등장했던 품위 있는 귀부인보다 더욱 품위 있는 분이었다 . 그 어머니를 본 나는 그 아이가 그토록 예의 바르고 심성이 깊은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 그 아이의 집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훌륭한 가정임에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

“ 선생님 , 이런 말씀 여러 번 들으셔서 제가 드리는 말씀도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으시겠지만 ...... 정말 ...... 너무너무 감사합 ......”

양평 가는 길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해 놓고 그 어머니는 말을 꺼냈다 . 아니 ,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했다 . 엄마 옆에 앉아 있던 그 아이가 손수건을 꺼내 엄마에게 주었다 .

“ 선생님 .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 꼭 들어주세요 .”

“ 말씀하세요 .”

“ 꼭 들어주셔야 해요 . 들어주실 수 있는 거니 약속해주세요 .”

“ 예 ...... 알겠습니다 .”

어머니가 핸드백을 열고 하얀 봉투를 꺼냈다 .

“ 용서하세요 . 정말 ......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그것은 난처함이나 부끄러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콧등이 시큰해서였다 .

“ 선생님 ...... 제발 ......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마시고 ......”

“ 아 , 아닙니다 .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 과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

“ 아니예요 , 선생님 ...... 선생님 은혜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러니 저희 마음으로 아시고 받아주세요 ”

그 아이도 엄마 옆에서 특유의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딸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내미는 봉투를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아들고 가까이 대고 바라보았다 . 얼른 안주머니로 감추고 싶지 않았다 . 봉투에서는 개똥 냄새만 풍기는 줄 알았던 나는 세상에는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봉투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