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전차 시대 연 ‘코끼리와 쥐’

하이브리드 전차 시대 연 ‘코끼리와 쥐’

[밀리터리 과학상식] 제2차 세계대전서 활약한 독일군 군용차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1875~1951). 그의 이름은 오늘날 고성능 스포츠카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쟁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의 또다른 일면을 알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위해 군용차를 설계 생산하기도 했다.

그가 설계한 자동차 중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폴크스바겐(Volkswagen)’은 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술 차량인 퀴벨바겐(Kübelwagen)과 그것의 수륙양용형인 슈빔바겐(Schwimmwagen)의 원형이자 종자돈까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누구나 폴크스바겐을 가질 수 있는 마이카 시대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폴크스바겐 구입 적금까지 운용했다. 그리고 나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금을 통해 모인 기금을 모두 퀴벨바겐과 슈빔바겐 생산 자금으로 써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초대형 구축전차 ‘페르디난트(Ferdiand)’, 그리고 명실공히 인류 최대의 전차인 ‘마우스(Maus)’의 설계자로도 유명하다.

이 두 전차는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범접하기 힘든 엄청난 덩치(각각 65톤, 188톤)를 자랑한다. 또한 그 시대에 이미 하이브리드식 구동체계를 썼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왜 페르디난트는 이 거대한 전차들을 하이브리드로 만들었을까.

미흡한 변속기 기술을 해결할 대안

페르디난트는 이미 초년 시절부터 전기식 또는 하이브리드식 자동차 구동체계로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그는 18세 때 빈의 벨라 에거 전기회사에 취직, 5년을 근무했다가 1898년 야콥 로너 베르케 사에 입사했는데, 이 회사에서 자신의 첫 자동차인 전기 자동차 에거 로너(C.2 파에톤)를 만들었다.

그리고 1901년에는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 차량을 내놓았다. 이 차량은 배터리 대신 다이믈러사의 내연기관을 탑재하고, 이 내연기관이 발전기를 돌려 전기 차축 모터를 돌리는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방식의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최대 시속 56km를 냄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속도 신기록을 달성함은 물론 1901년 엑셀베르크 랠리에서 포르쉐가 직접 운전해 입상하기도 했다. 1906년까지 300대가 팔린 이 차량을 개발한 공으로, 그는 1905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자동차 공학자에게 주는 푀팅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초년기 이런 기술적인 시도를 한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좋은 변속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계식 변속기에 들어가는 기어와 커플링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 자동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전기 모터가 바퀴를 직접 돌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기어와 커플링을 쓰는 기계식 변속기에 의존할 필요가 크게 줄어든다.

시간이 한참 지난 1939년, 포르쉐는 독일 육군의 신형 중전차 채용 경쟁에 참가하기 위해 ‘타입 100’이라는 사내 명칭을 단 시제품을 제조했다. 이것 역시 같은 이유로 하이브리드 방식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전차는 완성될 경우 중량이 최소 45톤 이상이 나갈 대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기술력, 특히 야금 기술로는 그렇게 엄청난 중량을 견디면서 높은 신뢰성과 수명을 발휘할 고품질의 변속기를 쉽게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하이브리드 구동체계를 사용해야 원활한 주행이 가능하다고 포르쉐는 생각했다. ‘타입 100’은 2대의 포르쉐 V10 엔진을 작동시키면 엔진이 발전기를 돌리고, 그 전기로 모터를 돌리고 그 힘으로 기동륜을 돌려 구동되는 방식이었다.

‘타입 100’은 개량을 거듭, 이름도 VK4501(P)로 바뀌어 1942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에 히틀러 앞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헨쉘 사의 시제품인 VK4501(H)를 채택. 이 전차가 훗날의 티거 전차가 된다.

어이없게도 포르쉐는 히틀러가 자신의 시제품을 반드시 채택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가 아직 채택도 하지 않았는데도 크루프 사에 VK4501(P) 차대 100대 분을 이미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점점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쟁 상황 상 완성된 차대를 놀려둘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차대에 고정식 전투실을 설치하고, 티거 전차의 포를 능가하는 화력의 71구경장 88mm 대전차포를 탑재함으로서 구축전차 ‘페르디난트’가 완성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만들었던 하이브리드 구축전차 . ⒸWikipedia

‘페르디난트’는 90대가 생산되어, 1943년 7월에 벌어진 동부전선 최대의 결전, 쿠르스크 전투에 첫 실전 투입되었다. 독일군이 공세를 지속하던 전투 초기, ‘페르디난트’는 무려 200mm 두께에 달하는 전면 장갑과 71구경장 88mm 대전차포의 강력한 화력을 십분 발휘, 원거리 전투에서는 거의 무적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투 후기에는 소련군의 조밀한 방어시설에 걸린 독일군의 진격이 지체되면서, 전투가 근접전 위주로 벌어지자 슬슬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는 자체방어용 기관총이나 전주위 잠망경 등 적 보병과의 근접전을 상정한 어떤 장비도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 거대하고 비싼 구축전차가 소련군 보병이 던진 화염병 따위에 격파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중량이 너무 무거워 기동성도 신통찮았다. 최고속도가 포장도로 시속 30km, 야지에서 시속 10km에 불과했다. 또한 한 번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회수할 방법이 영 마땅찮았다. 이론상으로는 18톤 포차 5대를 연결해 끌고 가면 된다지만 정신없는 전투 와중에서 그럴 여유를 찾기란 힘들었다.

1943년 11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48대의 ‘페르디난트’는 전훈을 받아들여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 ‘엘레판트(Elefant)’로 개칭된 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그러나 동부전선에 비해 산지가 많은 이탈리아는 ‘엘레판트’가 싸우기 적합한 전쟁터가 아니었다. 결국 계속 소모되어 가다가 끝까지 살아남은 4대는 베를린 전투에서 종전을 맞는다.

인류 최대의 전차도 하이브리드로

어떠한 적의 공격에도 격파당하지 않는 무적의 전차 개념이던 ‘마우스’는 1942년 7월 포르쉐의 제안을 히틀러가 받아들임으로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가 만든 인류 최대 규모의 전차 마우스도 하이브리드 구동방식을 사용했다. ⒸWikipedia

1943년 12월에는 모의 포탑을 얹은 V1호차(시제 1호차)가, 이듬해 3월에는 실포탑을 얹은 V2호차(시제 2호차)가 완성되었다. ‘마우스’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했다. 장갑 두께는 제일 두터운 곳이 460mm였고, 어지간한 부위도 190~200mm를 웃돌았다. 전비중량은 무려 188톤. 주무장은 55구경장 128mm 대전차포 1문, 36.5구경장 75mm 대전차포 1문이었다.

그러나 주행성능은 최고속도가 포장도로에서조차 시속 13km, 연비가 리터당 38m에 불과한 한심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 전차의 주행기구도 포르쉐가 매우 좋아하던 하이브리드 방식이었다.

히틀러는 ‘마우스’를 150대 발주했지만, 이 발주는 V1호차가 완성되기도 전인 1943년 10월 취소되어 버렸다. 결국 ‘마우스’는 두 시제차만 완성된 채로 종전을 맞았다. 독일군은 ‘마우스’ V2호차의 차체에 폭약을 설치, 자폭시켜 버렸지만, 포탑은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남았다. 소련군은 이 포탑을 회수, ‘마우스’ V1의 차체에 결합해 본국으로 가져가 각종 실험에 사용했다. 오늘날 ‘마우스’는 러시아 쿠빙카 전차박물관에서 거대한 덩치로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페르디난트’와 ‘마우스’에 탑재되었던 하이브리드 구동체계의 가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연비가 극히 나쁘고 조금만 미숙하게 조작해도 모터가 타 버릴 정도로 연약하다는 이유로 혹평을 퍼붓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 기술의 실태를 감안하면 페르디난트의 시도가 무의미하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대전 말기 독일군 중전차들은 최종구동장치에 들어가는 금속의 품질이 나빠, 잘못하면 기동륜 자체가 이탈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