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 양해바랍니다.)
1. 난 중딩시절에도 용돈모아 혼자서 극장을 가는 걸 즐겼다. 당시엔 돈의 가치도 몰랐기에 군것질은 100원짜리, 극장은 꾸깃꾸깃한 지폐주면 되는 줄로만 알았기에 극장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천원짜리 들고가서 매표소에 넣어주곤 했다.
내가 건네준 천원짜리를 받아든 매표소아저씨가 잠시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팔을 휘휘 저으며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 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른이 되고 추억에 잠기던 어느날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2. 동네 가까운 곳에 동시상영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선 개봉영화 하나와 재개봉 영화를 묶어서 상영을 했었고, 입구는 'ㄷ' 자 형태로 되어있었다. 정면은 매표소위쪽으로 커다랗게 메인 영화의 그림간판이 걸리고 양옆으로는 동시상영의 그림간판, 그리고 다음 개봉할 영화의 예고간판이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간판 아래 어른들 눈높이만큼엔 영화의 스틸사진들이 쭉 붙여져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게 오락실만큼이나 즐거운 곳이었고, 매일매일 그 사진들을 보는 게 낙이었다. 어제 봤던 사진들이지만, 오늘 또 보면서 영화의 스토리를 그려보기도 했다. 무협영화의 스틸사진이 걸릴때는 친구들 모두 가장 좋아하던 시기였고, 방화 '야누스의 불꽃여자'류의 스틸사진이 붙여질 땐, 어른들이 '이~~놈!!'하며 쫒아오진 않을까 주변을 살피며 몰래몰래 훔쳐봤었다.
3. 어느 날 그곳에서 유덕화의 '마비취'란 영화가 걸렸다. ( 유덕화의 '청옥불'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원표의 '청옥불'이었고, 난 '청옥불'을 안본 것같은데 왜 그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동시상영했던 영화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때 학교 개교기념일이었던가, 왜 학교를 안갔는지 모르겠지만 평일이었는데 난 집에 있었고, 그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난 기어코 돈을 집어들고 극장엘 갔다. (50원짜리 오락할 돈도 없던 내가 어디서 그 돈이 생겼는지도 기억에 없다. 엄마 지갑에 손을 댔었을까??)
평일 조조는 언제나 사람이 없었고, 그렇기에 싼값에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극장엔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 유덕화의 영화였지만 쾌찬차, 최가박당류의 영화가 인기있던 시절답게 중간중간 코믹한 액션도 섞여있었다. 그렇기에 저 멀리 텅빈 공간에서도 간간히 관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거다. 처음엔 별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내가 앉은 좌석 옆 저 멀리 누군가의 실루엣도 함께 가까워지는 게 보이면서 신경이 매우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니, 영화에 집중하는데 방해되잖아?' 그런데 머 어쩔껀가. 난 그때 키가 150이 겨우 넘었을 정도의 중딩 꼬맹이였을 뿐인데..
그러나 잠시후 난 결국 폭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실루엣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서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안은 거다.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난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저.. 이 손 치워주실래요?'
그 실루엣은 팔을 거두었고, 더이상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나는 씩씩거리면서 몇칸 앞으로 가서 앉았다.
'영화보는데 방해하고 있어.. 씨..'
유덕화의 발차기는 매우 멋있기에 화는 금방 풀렸다.
..
.
..
수년이 지나 난 대학엘 갔고, 수업중 성에 대한 챕터를 배울때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 지역엔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곳이 있어요. 그들이 모이는 목욕탕, 술집, 극장등등 어쩌고 저쩌고.. "
극장이란 단어를 듣고난 뒤부터는 교수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났다...
3. 대학다닐 때도 역시 영화를 쫒아다니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시네마떼끄'라는 영화상영회를 알게 되었을 땐, 파라다이스를 찾은 기분이었다. 당시엔 스크린쿼터, 영화직수입불가등등의 제약과 영화의 검열이 강력했기에 시네마떼끄가 아니면 존재자체를 알 수 없었던 영화도 수두룩했었다. 검열을 통해 '국내상영금지'딱지가 붙은 영화는 '꼭 봐야 할 영화'가 되는 아이러니한 시절이었다. 시네마데크를 통해 봤던 영화들 대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 내게 가장 충격을 줬던 영화는 '아키라'였다. 특히 주인공이 탄 오토바이가 질주하던 장면이 줬던 충격은 지금도 남아있다. '안 본 눈 삽니다'라는 인터넷 농을 처음 봤을 때 맨처음 떠오른 장면이기도 하다. 아키라를 처음봤던 그 시간으로 몇번이고 다시 되돌아가서 그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4. 당시 극장은 좌석제가 아니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표를 끊어줬고, 상영전이면 아무때나 검정가죽으로 덮힌 문을 열고, 검은 암막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서 남는 자리 아무데나, 없으면 계단에 앉아서 영화를 봤었다. 환한 대낮에 영화상영중일때 암막커튼이 젖혀지면 한줄기 짝퉁햇살이 스크린으로 뻗어가기도 했다. 요즘 시절 스마트폰 테러와 비슷한 느낌이다.
'파이란' 지방시사회때였다. 1,2회차 뿐이었는데, 인원수제한없이 돈만내면 다 입장가능하게 한 통에 사람들이 미친듯이 몰려들었다. 계단도 발 디딛을 틈없을 정도로. 난 상영관 출입문 앞쪽에서 1회차를 보는 중이었는데, 영화의 끝이 다가오자 2회차 관람객들이 좌석을 선점하기위해 암막커튼을 걷어젖히면서 한두명씩 입장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파렴치들이 선두를 트자 뒷사람들도 가만있질 못하고 진입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암막커튼은 아예 활짝 젖혀진 채 출입구는 벌써 2회차 대기인원들로 가득차버리고 말았다.
1회차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극장안이 밝아져 버려 짜증이 나는데, 왠 여자둘이 수다를 떨기 시작하더라. 본인들은 결말을 미리 보고 싶지 않았기에 주의를 다른데로 돌릴려고 그랬을 터.
그런데.... 그 조잘조잘 수다가 계속 되던 그 시점은
최민식이 바닷가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서서히 감정에 들어가던 지점이었고, 최민식이 울음을 터뜨릴 때 나역시 울분이 터지고 말았다.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집어서 그 년들에게 던져버린 거다.
영화는 이미 망쳤기에 분은 풀리지 않았고, 그 몰상식한 애들과 더욱 가까이 있던 관객들은 왜 가만있는 건가, 나만 예민한 거야, 머야? 씨x,을 속으로만 되뇌이다가 어차피 클라이막스를 다 말아먹은 거 영화감상은 반포기하고 말았다. 신경을 영화에 안쏟으니 그 두여자의 작은 속삭임이 들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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