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숨겨진 '시한폭탄'…광둥어 축소, 中 충성서약 추진
2019.08.19

반정부 정서 부추길 '불쏘시개' 더 있어
대입서 광둥어 시험 축소 추진.."다음 세대엔 우리 말 없다"
선거법 개정 추진..지역 의원, '중국 지지한다' 서명해야 출마 가능

홍콩 사태가 18일 평화 행진으로 큰 고비를 넘겼다. 21일 지하철 출근 시위, 24일 공항 진출입로 농성, 31일 대규모 행진 등 시위는 계속 이어지지만, 홍콩 시위대가 평화 시위 기조만 유지한다면 중국의 무력개입 같은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홍콩 시민들의 요구는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철회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현지 취재 결과, 그 외에도 시위를 격화시킬 수 있는 ‘도화선’ 같은 사안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었다.


홍콩 교육국, "‘국어(광둥어) 교육 과정 축소’"


중국어와 광둥어는 거의 다른 언어다.

지난 6월 28일 홍콩 정부 교육국 교과과정 대응팀(Task Force on Review of School Curriculum)이 초ㆍ중ㆍ고교 교육과정 검토 보고서를 내놨다. 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였다.

대응팀은 보고서에서 “국어(광둥어) 과목의 시험 횟수를 줄이고, 초ㆍ중ㆍ고 국어 교육과정에서 듣기ㆍ말하기 과정을 제외할 것”을 제안했다. 시험을 줄인다는 것은 곧 광둥어 교육 과정을 줄인다는 뜻이다.


홍콩 행정부 교육국 홈페이지. 시위가 한창이던 6월 19일 교육 과정 검토 보고서가 올라왔다 [홍콩 교육국 홈페이지]

현재 홍콩의 대학입학 시험(HKDSE)에서 국어(광둥어) 시험은 읽기(30%)ㆍ듣기(22.5%)ㆍ말하기(17.5%)ㆍ쓰기(30%) 네 부분으로 돼 있다. 각 영역의 시험 결과를 합산하는 방식이다. 대응팀은 이중 일상 생활과 직결되는 말하기와 듣기 영역 시험이 불필요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보고서는 "현재의 시험 유형이 지나치게 의사소통 위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줄이고 오히려 문화나 전통적인 부분을 늘려야 한다"고 적었다.

대입 시험 과목이 바뀌면 초ㆍ중ㆍ고 교육 과정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현재 홍콩 공교육 시스템에서 광둥어 교육이 전반적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홍콩 행정부는 이를 토대로 시험 제도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9월 16일까지 의견 수렴이 진행 중이다.

이후엔 입법회(의회) 교육사무위원회 토론을 거쳐 투표를 통해 시행 여부가 결정된다.

입법회 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기로 한 정책이 입법회에서 거부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입법회가 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정부가 홍콩에 본토 문화 심고 있다"...시위대 SNS서 반발 확산

홍콩 정부의 이같은 입시 정책 변경 계획에 홍콩 교사협회가 즉각적인 반대 입장을 냈다. 찬얀카이(陳仁啟) 협회 이사는 “말하기ㆍ듣기 시험은 사고 방식과 표현력, 이해력을 측정하는 것”이라며 “이 시험을 통해 학생의 사고능력을 증진할 수 있고 향후 취직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1일 캐리 람 홍콩 새 행정장관의 취임식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 [AP=연합뉴스]

정부 보고서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 문제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송환법 반대 이슈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 문제가 소셜네트워크(SNS) 상에 확산되면서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다. “우리 다음 세대는 더 이상 광둥어를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정부가 슬금슬금 홍콩에 본토 문화를 심고 있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다.

홍콩 명보와 동방일보 등 주요 언론도 지난주부터 비중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광둥어 교육 과정 축소가 홍콩 시위의 또 다른 불쏘시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선거 입후보자, ‘중국 충성' 서약 추진 논란..."기본권 침해"

이뿐 아니다. 홍콩에선 4년마다 지역 의원 선거가 열린다. 올해 11월 24일이 선거일이다. 그런데 홍콩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6월 11일 갑자기 28가지 선거법 수정안을 냈다. 이 역시 홍콩 시위가 시작된 이후다.

수정안에는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이 의무적으로 일종의 ‘이념’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확인서 문건을 보면 ‘홍콩 특별자치구는 중국과 분리될 수 없는 일부다’(2-1), ‘홍콩은 중국의 지방정부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그 권한은 중앙정부로부터 나온다’(2-2) 등이 포함돼 있다.

선거에 나가려면 사실상 중국 정부의 방침을 지지한다는 서약을 해야 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후보자가 당선되더라도 기본적으로 중국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홍콩 선관위는 지역 의원 입후보자는 모두 이 확인서에 서명하도록 하는 선거법 수정안을 추진하고 있다.[홍콩선관위 홈페이지]

홍콩 선관위는 이 수정안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를 7월 10일 이미 마쳤다. 홍콩법상 선관위는 입법회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직접 법안을 수정할 수 있다. 의견 수렴 내용은 통상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선관위가 수정안을 공표하기만 하면 이 때부터 법이 바뀌는 것이다.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주장하며 2014년 ‘노란 우산’ 시위를 주도한 황지펑(黃之鋒)은 지난 1일 “후보자의 이념적 성향을 근거로 국민 기본권인 참정권을 제한한 처사”라고 공개 비판했다.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우리는 홍콩인이다" 라고 자신이 직접 쓴 피켓을 들고 집회장을 찾은 남성.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자 수줍게 웃고 있다.

“홍콩에 자유를”(Free Hongkong)이란 구호를 외치는 홍콩 시민들의 마음 속에는 중국에 대한 불신이 이처럼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47년까지 홍콩 자치권을 보장하는 '일국 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갈수록 중국 정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송환법 반대 시위는 그런 중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홍콩인들의 저항이다. 광둥어 교육 축소나 지역 의원 이념 검증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홍콩의 중국화’로 인해 ‘자유’라는 기본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홍콩 시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