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제자리 - 밥벌이를 찾기 까지.

어린 시절 제본소 만화 중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흔하디 흔한 복수극인데 소재가 어설프기는 했지만 M&A 였습니다.

친구와 동업을 하다가 친구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

아버지는 폐인이 되었고 그 아들은 복수를 꿈꾸며 유학을 가죠.

시간이 흐르고 회계사가 된 주인공은 M&A 전문가가 되어 거대한 재벌이 된 아버지의 원수의 주변에 옵니다.

차츰차츰 복수의 칼을 갈던 주인공은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갈등을 하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흔해 빠진 줄거리 보다는 M&A 라는 것에 매료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초딩이었던 그때 회계사가 되어야 겠다 생각했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뭔 바람이 불었는지 도서관에 가서 회계원리를 빌려다 공부를 했습니다.

대입 준비를 해야 할 놈이 뭔 겉멋인지 회계 공부라니요.

암튼 수능을 보았고 역대급 어려웠다던 그 수능을 처음에는 망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역대급 대박이 터졌죠.

그래서 큰 어려움 없이 처음 손 꼽았던 경영학부 중에 한 군데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까지도 회계사가 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면서 생각이 슬슬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따분하고 숫자 가지고 노는 회계학 보다는 조직관리나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공필수 였던 회계원리만 듣고 나머지는 인사, 조직, 마케팅, 산업심리 뭐 이런 쪽으로만 파고 들었습니다.

나름 적성에는 맞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취업할 때가 되었는데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선은 군제대 하고 사업한다고 뻘짓 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학교를 휴학하고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졸업이 늦어지고 알바도 병행하다 보니 학점도 안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토익 열풍이 불기 시작했죠.

취업전선에 나설 때가 되니 소위 스펙이 엉망이었습니다.

3점이 안되는 학점, 서른이라는 나이, 인턴이나 해외 연수 등의 무경험, 낮은 토익 점수.

뭐 그래도 무조건 인사팀만 지원을 했었습니다.

당시 몇천명씩 뽑던 그룹 공채에서도 인사 부서는 많이 뽑아야 10명 안쪽이었던 상황에서

스펙 괴물들만 지원한다는 인사 부서만 고집을 했으니 서류 전형에서 물을 계속 먹을 수 밖에요.

당시 소위 아이디만 받으면 서류는 무조건 합격한다던 삼성 공채 사이트 DEAR SAMSUNG에서도 불합격을 받을 정도였다는...

그러는 와중에도 군데군데 원서를 내지 않았던 몇몇 기업에서 회계 부서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는 문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뭔 깡 인지 서류 전형도 물 먹는 주제에 인사 아니면 안된다고 거절을 하기도 했었죠.

그렇게 약 1년 동안 20 군데 정도 서류를 접수하고 서류 전형에 모조리 떨어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용공고를 보다가 한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의도에 소재한 작은 HR 및 전략 컨설팅 업체 였습니다.

컨설팅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회사 구경도 할 겸 이력서를 직접 제출하러 갔습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이력서 접수를 물어 보니 어떤 분이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하더군요.

요즘 세상에 이메일 접수도 아니고 방문 접수라니...

그 분이 저 보고 잠시 시간 있냐고 물어 보더군요.

그래서 그 분 사무실로 들어가서 약 2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이 대표시더군요.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이론적인 것 이나 제 생각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처음으로 서류 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 2명과 저 혼자 면접을 보더군요.

이번에도 대략 2시간 정도 면접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대화 때와 별 차이 없는 내용으로 면접은 진행되었고 면접도 합격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리포트 심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주어진 주제 몇 가지 중에 하나 골라서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것 이었습니다.

크게 어려운 내용이 없어서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취업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회사라 한 명만 뽑는 것 이었고,

OJT고 뭐고 바로 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처음 받은 직책은 AM으로 보조 컨설턴트 였습니다.

처음 한 3개월 동안 5개 정도 업체를 따라 다니면서 업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간단한 거 라면서 정부 심사 관련 과제를 맡기더군요.

정부 심사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업체에 가서 대신 사업계획이며 재무계획 등등의 리포트를 만드는 것 이었고,

그것이 제가 처음 메인으로 투입된 일이었습니다.

두 달 정도 야근해 가며 열심히 만들었고,

도중에 다른 업체 전략 컨설팅 작업에도 투입이 되어 두 개의 일을 끝냈습니다.

6개월 정도 빡세게 일하다가 회의를 느끼는 일이 생겼었죠.

전 컨설팅도 서비스업이라 최대한 고객의 눈높이에 맞춰서 고객이 원하는 해답을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생각했는데,

대표나 부대표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고객은 우리가 무엇을 주던지 간에 이해를 하지 못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그럴듯한 보고서일 뿐 이니,

우리 매뉴얼에 맞춰서 만들어서 던져 주면 우리 할 일은 끝이다 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듣고 나서는 그 곳은 크게 성장하기는 힘든 곳이라 생각하고 사표를 던졌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고 몇 달 노가다판을 전전 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부터 노가다판에서 주로 알바를 했기 때문에 익숙한 것도 있었고,

시간적인 제약도 많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팀 눈에 띄어서 같이 일을 다니는데 자주 가던 현장의 대표가 저에게 제안을 한가지 했습니다.

자기네 회사가 카자흐스탄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맡았는데 거기 현장 소장으로 나가볼 생각 없냐고 하더군요.

말이 현장 소장이지 가서 관리 업무만 해주면 되고 기술적인 것은 자기네 기술자들이 다 하니까 신경 안써도 된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들어가는 체재비는 별도로 다 나오고 보장된 연봉도 꽤 높은 금액이었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한번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대학 선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선배는 저와 나이 차이가 거의 스무살 가까이 나지만 대학 다닐 때 부터 알게 되었고,

저에게 여러 모로 도움을 주셨던 선배였습니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제가 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해외에 나갈 준비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더군요.

그리고는 단도직입으로 자신 좀 도와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은 당시 국내 10위권의 회계법인 대표로 계셨었습니다.

자신이 부업을 시작해서 내부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힘들 때 도움이 많이 되셨던 분이라 도움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수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해외에 나가기로 한 것은 사정을 말씀드리고 취소를 했습니다.

3일 뒤 부터 출근하라고 해서 일단 회계원리 한 권을 사서는 읽었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손도 안되던 거라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3일 동안 다시 공부를 하고 첫 출근을 하고는 그 뒤로  거기서 8년 가까이 일을 했고,

회계 관련 업무가 제 밥벌이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길로 올 것을 왜 이리 돌고 돌았을까도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참 얄궂죠.

처음 회계 공부를 포기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숫자놀이가 재미가 없었던 것 이었는데,

이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이론적인 숫자놀이가 아니라 실무적으로 숫자놀이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서 그 안에서 아주 작은 구멍을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이 재미가 있더군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재개발조합은 모든 사업을 종료하고 청산하기 위해서는 청산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청산 감사 받을 때 제출되는 재무제표는 일반적인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자금수지계산서라는 것을 제출해야 합니다.

몇 번의 청산 감사를 쫓아다니다가 직접 자금수지계산서를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었습니다.

옆에서 보고 배운 것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서 그렸습니다.

꽤 규모가 크고 거의 20년 가까이 진행되었던 사업이라 사업 규모가 5천억 이상으로 꽤 컸습니다.

수입과 지출을 딱 맞춰야 하는데 이게 차액이 16원인가가 도무지 맞지를 않는 것 이었습니다.

이걸 찾기 위해 다시 처음 부터 자료를 다시 뒤지면서 일주일 넘게 끙끙 댔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리 찾아도 그 금액이 찾아지질 않는 겁니다.

현대건설과의 공문들도 다시 찾아 보고 하던 와중에 결국 16원을 찾았습니다.

중도금을 미리 납부하면 미리 납부한 만큼 이자금액을 계산해서 중도금에서 할인을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건설에서 그 할인이자를 지급한 것으로 처리를 하고 실제로는 지급을 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거죠.

당시 담당자는 그럴 일 없다면서 자기네는 문제 없이 다 처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해당 지급리스트를 보여 주면서 실제 지급대장을 보여 달라고 했죠.

실제 지급한 일이 없으니 지급 대장에 해당 내역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가 그걸 어떻게 찾았냐고 황당해 하면서 뒷수습을 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이 일을 재미를 느꼈었습니다.

암튼....밥벌이 처음에 선택 잘 했다가 이게 아닌가 보다 하고 십년 넘게 헤매다가

다시 원래 선택 했던 길로 돌아오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