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우리 같은 곳서 성고문…‘사북항쟁’ 국가폭력의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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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우리 같은 곳서 성고문…‘사북항쟁’ 국가폭력의 야만
조문희 기자 [email protected]

수십명이 강원 정선경찰서 강당에 마련된 임시 조사실로 연행됐다. 조사실 내부에는 각목, 포승줄, 고무호스, 곡괭이, 주전자 등 고문 도구가 놓여 있었다. 강당 벽을 따라 칸칸이 만들어져 ‘돼지집’처럼 빽빽한 조사실에서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떤 사람은 ‘통닭구이’ 상태로 허공에 매달려 폭행을 당했다. 두들겨 맞다가 다른 공간으로 끌려가 물고문도 당했다. 조사실 칸막이를 헝겊이나 베니어판으로 만든 탓에 옆 조사실에서 다른 사람이 구타당하는 것이 보였다. 성고문까지 병행된 조사실에서 피해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방치됐다. 1980년 사북항쟁 참가자들을 상대로 한 국가폭력은 공개 고문에 가까웠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는 사북항쟁 41주년을 하루 앞둔 20일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의 실상과 특이점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며 “좁은 공간에 남녀를 몰아넣고 사실상의 공개 고문을 자행했던 임시 조사실은 국가폭력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장 야만적인 고문 공간이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까지 재단법인 진실의힘과 함께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1기 진실화해위)가 발간한 ‘80년 사북사건 보고서’ 등 수천쪽에 이르는 관련 문건들과 피해자 등 관련자 50여명의 구술 내용을 종합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연구소는 “사북항쟁을 국가폭력에 초점을 맞춰 종합적으로 분석한 첫 결과물”이라고 했다.

연구소는 여성을 상대로 한 성고문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당시 군 보안부대·경찰·검찰·중앙정보부로 구성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손, 경찰봉, 야구방망이로 특정 신체 부위를 쿡쿡 찌르는 방식으로 여성들을 괴롭혔다. 물고문 중 옷가지가 내려가면 몸을 함부로 만지고 그 상태에서 폭행했다. 한 피해자의 경우 임신 4개월 상태에서 고문을 받고 유산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음부나 가슴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고 살아서 자식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황인욱 연구소장은 “그동안 사북항쟁 피해자들은 국가폭력 피해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요구받았다”며 “잔혹한 국가폭력에 대해 국가와 권력기관은 당사자와 국민에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구제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연구소는 이날 경향신문에 피해자 150명의 명단을 최초로 공개했다.


[단독]연행 일주일 전 작성된 명단…‘신군부 계획된 만행’ 증거
조문희 기자 [email protected]

‘사북항쟁’ 연행자 명단 보니

1980년 5월6일 강제 연행
명단은 4월30일에 쓰여
이름·주소·행동내용 상세

정선지역사회연구소는 20일 공개한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의 실상과 특이점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통해 사북항쟁을 국가 주도의 조직적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정부가 피해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연구소는 이 보고서를 국가인권위원회와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전달하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할 계획이다.

1980년 4월 강원지역에서 벌어진 사북항쟁은 5·18민주화운동이나 제주4·3 사건 등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 신군부가 항쟁 당시 언론 보도를 통제한 데 이어 항쟁 직후 이 사건을 ‘광부들의 난동’ ‘부녀자 집단 린치’라고 폄훼했기 때문이다. 당시 광부들이 저지른 일부 폭력행위에 초점을 맞춰 열악한 노동조건 등 사건의 이면을 들춰보지 않고 악마화한 탓이 크다.

1기 진실화해위가 2008년 내놓은 ‘80년 사북 사건 결정문’ 역시 항쟁 이후 자행된 국가기관의 고문 등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항쟁의 시발점이 된 1980년 4월21일 상황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기술했다.

이번 조사는 사북항쟁 다시 쓰기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연구소는 “광부 동향을 불법 사찰하던 사복 경찰이 광부들에게 발각돼 도망치면서 이를 가로막은 광부들을 지프차로 치었다. 수백명의 노조원을 넘어 가족을 포함한 수천명이 항쟁에 합류한 계기는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현장 목격자들의 외침이었다”고 밝혔다.

신군부의 고문 등 조직적 폭력이 시작된 것은 항쟁 발생 보름 후다. 그해 4월24일 광부 대표들과 협상한 신군부는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군 보안부대와 경찰이 주축이 된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을 꾸려 5월6일부터 경찰서로 사람들을 연행했다.

경향신문이 연구소에서 입수한 연행자 명단에서도 공권력의 기만행위를 짐작할 수 있다. ‘동해물산’ 이름으로 작성된 연행자 명단이 4월30일 이미 작성된 것이 대표적이다. 황인욱 연구소장은 “계엄당국이 이미 연행 전부터 관련자를 잡아들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행 과정은 무차별적으로 진행됐다. A씨 등 10여명은 5월6일 오후 7시쯤 읍·면사무소에서 회의를 열었다가 붙잡혔다. 이후 광부들은 사택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폭행당하며 끌려갔다. 피해자 일부는 지금도 그때 겪은 공포에 따른 후유증으로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2008년 사북 사건 합수단의 가혹행위를 인정했지만 온전한 진상 규명과 피해 구제에는 이르지 못했다. 1기 진실화해위는 국가의 사과, 피해 보상,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등을 권고했지만 이는 법적 강제력이 없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에서 피해 구제를 위한 실효성 있는 권고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황 소장은 “항쟁 과정에서 일부 광부가 어용노조 지부장의 가족을 폭행한 것은 사실”이라며 “큰 틀에서 지부장과 가족 역시 국가폭력의 희생자다. 국가는 ‘노노 갈등’ 프레임을 넘어 지부장 측 피해자도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