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정말 없는 성격인데, 한번 터져버린 눈물이 좀처럼 멈추지가 않아 답답한 마음에 글을 적어봅니다.
저에게는 할머니가 한분 계십니다.
이제 곧 100세를 바라보시는 분인데, 어렸을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는 바람에 저는 할머니 슬하에서 컸습니다.
최근 들어 하루에 거의 한번꼴로 할머니께 전화가 와서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원래 이렇게 자주 전화하시는 분이 아닌데... 이상하게 누나가 출산을 한 이후로 저에게 유독 전화를 많이 하시더군요.
뭐 전화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건강하냐, 밥 잘 먹냐, 회사 일은 어떠냐. 늘 같은 질문에 늘 같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여느때처럼 퇴근길에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는데, 할머니께서 평소처럼 이런저런 제 근황을 물으시더니 갑자기 딴소리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께 손주가 여러명있는데, 갑자기 전화 잘하시다가 저를 그 손주들 중 다른 한명으로 착각하시더군요.
할머니가 비록 나이가 많으시지만, 여전히 기억력도 좋으시고, 혼자서 산책도 다니시고, 책도 읽으시는 분인데,,,
요 며칠전부터 전화로 했던말을 또하고 또하고 하신다 싶었는데, 오늘은 전화통화하는 동안에도 저를 여러번 헷갈려하시더군요.
그렇게 할머니께 "할머니 나야 XXX."라고 여러번 말씀드리다가 할머니 핸드폰 배터리가 다되는 바람에 결국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리고 때부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와 멈추지가 않습니다.
마스크를 쓴 덕에 지하철에 마스크 뒤로 진짜 입술에 피가날때까지 이악물고 버티면서 소리 안내려고 꺼억꺼억 울었습니다..
부모님껜 죄송한 말이지만, 저한테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저희 할머니께서는 제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저를 향해 무조건적인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한평생 저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셨습니다.
단연컨대 저는 할머니가 제게 주신 사랑은 '인간이 보여줄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할머니 인생에서 1순위는 언제나 저였고 지금도 자나깨나 제 안위만 걱정하고 계십니다.
제가 어릴때는 할머니가 너무 저를 사랑해주셔서 성격이 진짜 개차반이었습니다.
유치원때인가, 할머니가 절 봐주시느라고 저희집에 와계시는데 뭐 짜증나는 일있으면 툭하면
"할머니 왜 우리집에 왔냐고 나가라고" 할머니를 쫒아내곤 했습니다.
너무 할머니께서 우쭈쭈해주시니까 눈에 뵈는게 없었던거죠. 물도 제가 떠마신적 없으니....
하지만 할머니는 제가 그렇게 할머니 마음에 대못을 박아도 늘 밥때가 되면 제 끼니가 걱정되어 집에 오셔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며 제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에 저희 할머니는 단 한번도 저에게 자신의 서운한 속내를 이야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커서 저도 이모님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들었는데, 제가 어릴때 그렇게 할머니 쫒아냈을때 너무 속상해서 밖에서 우셨던적도 있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콱 죽어버릴까라고 생각하셨던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배신감이 너무 커서 그러셨겠죠.
그런데도 제가 밥은 잘 챙겨먹을까 걱정되서 늘 다시 돌아오셨습니다.저는 돌아오신 할머니께 반찬투정을 했고요....
다행히 제 ㅈㄹ맞은 성격은 일찍이 "할미꽃"이란 동화책을 읽고 고쳐졌습니다.
여느때와 같이 할머니를 쫒아낸 후 그 동화책을 봤는데, 내용에 충격을 먹고 그 이후로 할머니 삶의 1순위가 저이듯이 저는 제 인생에 0순위로 할머니께 효도하고 은혜갚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눈물이 터져버린 이유는 어느새 제가 할머니와 약속했던 100살이라는 숫자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어릴때부터 제 유일한 소원이자 기도제목은 할머니께서 100세까지 사시는거였습니다. 어린 저에게 100이란 숫자는 굉장히 큰 숫자였고, 그정도면 제가 충분히 할머니께 효도하고 은혜를 다 갚을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할머니의 사랑은 너무나 컸고, 저는 너무 부족한 손주였나봅니다. 어느새 한평생 할머니와 약속하고 신께 기도드렸던 100이라는 숫자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저는 여전히 할머니께 해드린게 없고 해드릴수 있는게 없는것만 같아 너무 속상합니다.
주민등록상으로 할머니께서 96세시라 깜박깜박하시는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저에겐 "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네 할머니가 100세가 되면 약속대로 니 할머니를 데려갈거야."라고 신이 말하는것만 같아 지하철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나를 위해 살았나, 할머니에게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굳게 다짐해놓고...너무 이기적이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저에게 아무것도 바란적 없으신 저희 할머니의 평생 소원이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본인이 죽기전에 제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절 닮은 증손자를 보는 것입니다.
다행히 저에게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래서 제일 큰 문제고 그래서 더욱 속상하여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너무 옛날 분이시다보니 외국인인 제 여자친구를 강력하게 반대하십니다. 싫어하기 보다는 너무 옛날 분이시다보니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과 혹시나 제가 잘못될까하는 저에 대한 걱정으로 여친을 괜히 싫어하시는게 크신거 같습니다.
어쨌든 이렇다보니 늘 절 볼때면 '한국여자 만나라 더 좋은 사람 만나라'라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셨고 잔소리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건강도 안좋으신데 제 미래와 결혼에 대한 걱정이 너무 많으신거 같아... 그냥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말을 듣고 할머니는 천만 다행이라며,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이 할미는 죽기전에 내새끼 결혼하는건 꼭 보고싶다고 하시면서....
저는 여자친구를 정말 사랑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도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할머니 은혜에 꼭 보답해드리고 싶고,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저희 할머니는 한평생 가족이나 저에게 뭘 해달라, 갖고싶다고 하신적이 단 한번도 없으십니다)을 꼭 이뤄드리고 싶은데,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무것도 없는거 같아 너무 속상하고 슬픕니다.
이제 정말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만 같은데... 할머니 목소리 듣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제 정신도 가끔 오락가락 하시는 할머니를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한것같고, 좋은 방법도 아닌것 같습니다...
괜히 더 큰 스트레스 받게 해드리고 싶지도 않고....남은 여생은 행복하게 보내셨으면 합니다. 정말 저와 저희 가족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신 분이시거든요...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렇다고 여자친구를 포기하겠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제가 너무 사랑하는 두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기력한 제 모습이 너무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글을 적어봅니다.
어떠한 조언이나 질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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