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멸망한 668년부터 698년에 발해가 건국하여 성쇠를 거듭하다가 멸망한 926년까지 258년간의 역동적인 만주의 역사를 발해와 한민족의 관점에서 서술해 놓은 대하 역사 소설이다.
발해에 대해서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KBS TV에서 방영했었던 드라마 "대조영"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총 2천 페이지가 넘는 역사 소설로 읽어 보는 건 처음이라서 16일간 열독하게 됐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포위되어 고구려의 보장왕이 항복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고 평양성에서 적군들의 삼엄한 포위를 뚫고 탈출한 대중상과 대조영 부자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말갈족을 이끄는 말갈족의 수령 걸사비우와 함께 멸망한 고구려를 부흥시킬 꿈을 키운다.
거란족과 연합해서 당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던 요서의 영주를 빼앗은 연합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요서와 요북은 거란이 차지하고 요동과 드넓은 만주 지방은 대중상의 고구려, 말갈 연합군이 차지하기로 한다. 당나라에 빼앗긴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고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뿔뿔이 흩어진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고구려를 부흥시키기 위한, 작지만 원대한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당군은 요서를 차지한 거란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거란 가한 이진충은 당군의 사주를 받은 돌궐군에 의해 전사하고 그 뒤를 이어 가한이 된, 이진충의 처남인 손만영은 거란의 본거지인 영주성을 빼앗기고 나서 자객에 의해 피살된다. 손만영의 뒤를 이어 제3대 가한이 된 이해고는 당군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음을 알고 군사들을 데리고 당에 항복한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이해고를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을 토벌하는 우두머리 장수로 삼아서 30만 대군을 주어 유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만주의 동쪽으로 행군하는 무리를 추격해서 토평하게 한다.
대중상은 중신들과 논의해서 동모산을 도읍으로 정하고 유민들 중에 걸음이 느린 노약자들을 돌보면서 천천히 행군하다가 동모산으로 가는 길의 험로인 천문령에서 적군과 결사 항전을 벌이기로 한다. 그러나 천문령에 가기 전에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중상은 병사하는데 대중상의 유언에 의해 대중상의 시신은 매장하지 않고 화장해서 그 재를 산마루에 뿌리게 된다.
천문령에서 배수진을 친 대조영은 험한 산세를 이용해서 매복과 화공 등의 계책을 써서 생사와 흥망을 건 대결전을 벌인다. 이 천문령 대첩에서 댜조영은 7만 명의 군사로써 증원되어 40만 대군으로 늘어난 당군을 대패시켜서 살아서 돌아간 당군은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승을 거둔 대조영은 유유히 동모산으로 군사와 유민들을 이끌고 들어가서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발해를 세운다. 여기서 발해란 중국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삼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발해만을 가리킨다.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지 않고 발해로 정한 것은 대중상과 대조영이 고구려의 왕족인 고씨를 왕으로 옹립하지 않고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씨도 사실은 고구려의 왕족인 고씨였었는데 고씨의 자손이 너무 많아져서 고씨의 별종(別宗)으로 방계손인 대씨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군이 발해를 치기 위해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등주와 유주에 대군을 집결시키자 대조영은 돌궐과 연합하여 돌궐군에게 요서를 치게 하고 발해군은 요동의 신성과 요동성, 박작성과 마자수(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박작구 등을 빼앗는다. 이리하여 요동 지방은 요동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비사성만 제외하면 발해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무려 5만 명의 적군이 진을 치고 있던 박작구는 고구려의 수군 장수였었던 장작명의 아들인 장사무가 수군 장수로서 낡은 군선 6척에 결사대 5백 명을 태우고 선봉이 돼서 적군의 군선들에 불화살을 날리며 승기를 잡고 전멸에 가까운 장렬한 전사를 해서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장사무의 아들이 나중에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해서 등주를 빼앗고 대승을 거둔 장문휴인 것이다.
돌궐이 요서에서 물러가자 이해고는 당군을 이끌고 요서로 쳐들어가서 거란과 말갈의 잔당을 토벌하여 그 포로들을 측천무후에게 바친다. 측천무후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해고를 국공(國公)으로 삼는다.
당나라가 발해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조영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친정(親征)에 나선다. 그러자 당에서는 천문령에서의 대패로 인해 조정과 군사들이 모두 발해를 두려워해서 화의(和議)하자는 중론이 모아져 결국에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화의를 하게 되어 발해군은 철군한다.
당나라에서는 재상 장간지와 대장군 이다조가 측천무후를 내쫓고 측천무후의 3남인 황태자 이현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 사람이 곧 중종이다. 이현이 발해를 의식해서 장간지에게 물으니 장간지는 지금 발해의 세력이 강해서 싸우기가 어려우니 황손을 서로 숙위(宿衛)로 교환해서 보내기로 하면 대조영이 둘째 아들 대문예를 숙위로 보낼 테니 대문예를 포섭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청한다. 이현은 이 계책을 따른다.
대조영은 발해의 도성을 동모산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홀한수 기슭의 평지성인 천통성으로 옮기고 대문예를 당나라에 숙위로 보낸다. 대문예는 당나라에 가서 황제 이현의 동생인 이단의 셋째 아들인 이융기와 친하게 되는데 이융기는 고구려의 유격장군이었던 왕구루의 아들인 왕모중을 호위관노(護衛官奴)로 부리고 있었다. 당나라에 숙위로 있던 중에 대조영의 첫째 아들인 대무예가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문예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발해의 황위를 빼앗겠다는 역심을 품게 된다. 이 부분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골육상쟁으로 인해 고구려가 망하게 된 역사를 재현하려는 당나라의 심모원려한 계책이라서 읽는 중에 소름이 끼쳤다.
당나라에서는 황제 이현이 죽자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이융기가 왕모중을 모사로 삼아서 정변을 일으켜서 정적들을 제거한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곧 현종이다. 이융기는 정변의 일등공신인 왕모중을 대장군 겸 국공의 자리에 앉힌다.
당나라의 사신으로부터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한다는 국서를 받은 대조영은 대노하여 사죄의 뜻으로 요동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비사성을 내놓지 않으면 중원까지 쳐들어가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결국 이융기는 중신들과 상의해서 전쟁을 피하고 발해에 비사성을 비워 준다. 이리하여 발해는 고구려의 잃어버린 땅을 모두 수복하게 된다.
그 후에 당군이 요서에서 돌궐과 거란, 해족을 물리치자 대조영은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에 요하를 건너서 통정진과 회원진을 거쳐 고구려가 축조했었던 천리장성을 넘어서 쳐들어온 것을 염려해서 대무예에게 7만 군사를 주어 천리장성과 요하의 사이에 있는 요충지인 통정진과 회원진을 빼앗게 한다.
대조영은 698년부터 719년까지 21년간 재위하다가 719년에 첫째 아들인 대무예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병사한다.
대무예는 당나라에서 숙위로 있다가 돌아온 동생, 대문예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아직 복속되지 않고 당나라의 사주를 받아서 국경을 어지럽히는 흑수말갈을 치게 한다.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나라를 자극해서 대침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서 이를 반대하던 대문예는 이를 기화로 모반을 일으킨다. 당군의 도움을 받아서 발해의 왕위에 오르고 당에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그만큼 발해의 왕이 되려는 집념이 강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계책이 성공했었다면 발해는 당나라에 의해 더 빨리 멸망했을 것이다.
발해의 관군이 동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천천히 추격하니 반란군의 무리는 탈주자가 늘어나게 되고 대문예는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일백여 명의 군사만 데리고 당나라로 도주한다. 이융기는 대문예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고 환대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의 동생이고 대무예의 숙부인 대야발이 생전의 대조영이 명령했었던 단기고사(檀奇古事)를 13년간 집필해서 탈고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연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군들이 서고를 불태워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를 전부 없앴는데 단군조선 2096년과 기자조선 1093년의 역사를 담아 놓은 단기고사를 다시 써 놓았으니 한민족의 유구하고 장엄한 문화와 역사를 재현하고 과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다시 쓴 단기고사도 발해가 멸망할 때에 거란군이 다 태워버려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게 된다.
그런데 당나라에 유학을 갔었던 대무예의 첫째 아들인 대도리행이 당나라에서 의문의 병사를 한다. 의심을 품은 대무예는 머지않아 당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당의 기를 꺾어 놓기로 결심하게 된다.
한편 왕모중은 장수들을 끌어들여서 자기 편으로 만들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 장수들에게 자신을 병부상서로 임명하라고 주청하게 한다. 고력사를 비롯한 환관들이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청하자 이융기는 왕모중의 무리들이 정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왕모중과 그를 추종하는 장수들을 모두 한직으로 좌천시킨다. 대문예는 왕모중에게 반란을 부추기지만 왕모중은 이미 이융기가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조서를 내렸다고 말하며 반란에 실패하면 자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학살을 당할 것이라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결국 왕모중은 황명에 의해 양주로 귀양을 가는 길에 내려진 조서에 의해 교수형을 당해서 죽는다.
대무예는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꺾기 위해서 장사무의 아들인 수군대장군 장문휴와 당과의 안시성 싸움으로 유명한 양만춘 장군의 손녀인 충무장군 양소화로 하여금 등주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대무예도 친정하여 요하를 건너서 영주를 공격한다. 마침내 격전 끝에 발해군은 등주와 영주를 빼앗게 된다.
이융기는 신라에 협공을 요청하지만 겨울이 되자 추위에 약한 신라군은 추위에 떨면서 진군하다가 얼어 죽고 또한 발해군의 기습에 죽게 되어 결국 전의를 상실해서 퇴각하게 된다. 당에서는 대문예에게 군사를 주어 발해군과 싸우게 했지만 대문예도 대패해서 퇴각하게 된다.
대무예는 중경성을 축조하여 도성을 천통성에서 교통이 더 편리한 중경으로 옮긴다. 대무예가 18년간 재위하다가 737년에 병사하자 그의 셋째 아들인 대흠무가 황위를 계승한다.
등주에서의 전공으로 장군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인 보국대장군에 오른 장문휴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해를 평정하다가 대흠무에게 상소를 올려서 신라를 정복할 것을 주청한다. 중신들과 논의해서 주변 정세를 감안할 때에 신라 정복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대흠무는 장문휴를 도성으로 불러들이지만 장문휴는 인편으로 사직 상소를 올린다.
장문휴는 상처(喪妻)하고 나서 공진방 장군의 딸인 공사량과 관계를 맺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공사량과 만나게 된 대흠무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공사량의 미모에 반해서 공사량을 후궁으로 앉힌 것이다. 장문휴에게는 연인을 빼앗은 군주와 조정에서 함께 늘 대면한다는 게 불편했기 때문에 입조를 거부하는 속내가 있었다. 대흠무는 대노해서 무례한 장문휴를 참하려고 하지만 고구려에 망명한 백제인이자 의술에 능통하여 중신이 된 신재용의 아들인 태사 신승이 간하자 그를 용서하기로 한다.
한편 흑수말갈을 거침없이 정벌하여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대일하가 영자성에서 병사하자 흑수말갈의 발호를 경계한 대흠무는 흑수말갈을 제압하기 위한 적임자를 물색하는데 양소화가 자진하여 나서서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말갈의 정벌에 나서게 된다.
양소화는 승전을 거두지만 다른 장수가 천혜의 요새인 자림성을 적군의 지략에 의해 빼앗기자 후방의 적군을 놓아두고 진군할 수 없어서 고심한다. 이때 장문휴가 사직을 하고 몇 명의 부하만 데리고 있다가 5천 명의 민병을 모아서 다른 곳의 흑수군을 물리치고 2천 명의 민병들에게 흑수군의 군복을 입혀서 계략으로 자림성에 무혈 입성한다. 장문휴의 전공을 안 대흠무는 그를 보국대장군에 복직시킨다. 장문휴는 대흠무의 사면 칙지에 감읍하지만 적장 오소걸몽을 사로잡아서 황은에 보답하겠다며 다시 전장에 나서서 오소걸몽을 사로잡지만 오소걸몽의 본진을 섬멸하기 위해서 더 진격하다가 적군의 독화살을 맞고 죽는다. 양소화는 울면서 자림성을 수복하고 나서 함께 하룻밤을 지낸 장문휴와 영가혼례(靈駕婚禮)를 올리겠다고 주청하니 대흠무는 이를 허락한다. 이리하여 흉맹한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된다.
한편 당나라로 망명한 대문예의 아들인 대청천은 고력사의 사주로 몇 명의 자객들을 데리고 발해에 가서 대흠무를 암살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홀로 살아서 당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발해에서는 이융기의 신임을 얻고 있는 평로절도사 안녹산에게 미인계를 써서 발해 여자 이합비를 줘서 그에게 반란을 유도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허구인 듯하다.
대흠무는 보국대장군이 된 양소화를 대신의 반열에 오르게 하려고 하지만 여자가 대신이 되는 것을 중신들이 반대하자 그녀를 어사로 삼아서 서경압록부로 보내는데 이 서경압록부의 도독 공심지는 바로 장문휴의 정인이었었던 공사량의 오라버니였다. 양소화는 공심지가 아주 대담한 탐관오리라는 물증을 잡고 이를 고하기 위해서 황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공심지의 부하들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공심지를 참수하고 나서 장계를 올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한다.
대흠무는 무명선사를 찾아가서 할아버지인 대조영이 천축국에서 진신사리를 얻어 오라는 유지를 남겼다는 것을 말하고 그에게 그 유지를 실행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무명선사 일행은 천축국으로 가는 길에 안서에 있는 고선지 장군도 만나고 그의 도움을 받아서 험로에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천축국에 도착해서 마침내 진신사리 두 개를 얻어서 4년 만에 환국하게 된다. 대흠무는 무명선사의 권유대로 상경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상경에 도성을 축조하는 중이었는데 상경에서 무명선사 일행을 맞이하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황궁의 왼쪽과 오른쪽에 사리탑을 하나씩 세우고 그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게 한다.
한편 양국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안녹산은 755년, 범양에서 20만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고선지가 장안의 관문인 험준한 동관에서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예상 외의 대승을 거두었지만 환관 변영성의 모함으로 진중에서 참수된 후에 동관은 반란군들에게 함락되고 안녹산은 756년 정월에 낙양에서 대연을 세우고 황제가 된다.
대흠무는 상경성이 완공되자 상경으로 천도한다.
이융기는 반란군들의 서슬 퍼런 예봉을 피해서 파촉으로 몽진하게 되는데 그 도중에 배를 곯은 호위 군사들의 원성이 일자 그 원성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호위대장 진현례가 양국충을 죽이고 나서 양귀비마저 죽여야 한다고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양귀비를 죽이도록 내버려둔다. 이융기는 파촉으로 달아나고 태자 이형은 영무로 달아나서 신하들의 추대로 황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곧 숙종이다.
안녹산은 차남인 안경서의 심복에게 피살되고 이합비는 안녹산이 피살될 때 같이 피살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안경서도 안녹산을 도와서 난을 일으킨 사사명에게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사사명이 다시 황위에 오른다. 또한 사사명도 안녹산처럼 아들인 사조의에 의해 피살된다. 763년에 사조의도 대세가 기울자 자살하게 되어 안사의 난은 끝을 맺게 된다.
762년에는 당나라의 현종 이융기가 죽고 숙종 이형도 죽는다. 그리고 이형의 장남 이예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는데 이 사람이 곧 대종이다.
대흠무는 간쟁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주공신의 딸인 주소연을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간쟁으로 삭탈관직이 됐었던 주공신을 다시 신하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당나라의 영주에서 거상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대견강의 딸인 대술묘도 후궁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대흠무는 대술묘의 오라버니인 대원의가 대화를 나눠 보니 지략과 기개가 담대하다고 생각하여 흡족해 하며 중용하리라 마음먹는다.
대원의는 여러가지 훌륭한 말들을 하면서 황후 고흔정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고원을 귀양 보내고 양소화를 삭탈하라고 주청한다. 고원은 벼슬도 마다했지만 고구려 왕손의 혈통을 가지고 있고 그의 제자들이 중용되어 세력이 막강하므로 반심이 생기면 실행하기 쉽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는, 부부의 평등권을 정한 10호 연좌제를 만든 양소화 때문에 뭇 진신들과 사족들이 황제의 성덕이 흐려졌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만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대흠무가 죽은 신승의 아들인 태부 신석정을 불러서 물어보니 신석정이 말했다.
"폐하,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는 이득이나 덕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국구 고원은 덕이 있어 사람이 모여들고, 대견강은 이득이 있어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옵니다. 덕을 좇는 자들은 도리를 지키지만, 이익을 좇는 자들은 사욕을 위해 음모와 흑심을 품게 마련이옵니다."
"폐하, 재물은 반드시 사람을 떠나지만 덕은 후세까지 모여드옵니다. 지략이 지나치면 음계(陰計)가 되고 음계가 지나치면 반심(叛心)이 되옵니다. 대견강 부자를 경계하옵소서."
그런데 여자로서 대신이 된 양소화가 홍수가 났을 때에 강물에 빠져 죽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녀를 미워한 권신들의 암계(暗計)이거나 그녀가 매섭게 비판한 대원의 일가의 응징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실은 양소화의 비장인 주서채가 대원의의 사주로 양소화를 죽이고 강물에 던진 것이었다. 양소화는 대견강과 대원의가 해적질도 서슴지 않고 백성들을 착취하여 재물을 모았다고 상소했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대원의의 범행이었다. 대원의는 주서채의 입을 막기 위해 주서채도 죽인다.
한편 고구려의 후손인 이회옥은 산동 지역에서 고구려의 후손들의 지지를 받고 무공도 높아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이예는 그가 반심을 품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의 반심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를 평로치청절도사로 삼고 그에게 이정기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대원의는 일찌기 이정기를 알고 있었기에 발해의 사신으로 등주를 왕래하면서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중원 정복의 원대한 꿈도 품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황후 고흔정이 독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태사 신석정과 국사인 무명선사는 검시를 해서 사인을 밝혀야 한다고 간하지만 대흠무는 황후의 몸에 칼을 대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겨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국문을 당하는 조리사들이 뜻밖의 배후를 자백하니 대흠무는 이를 믿고 치죄를 한다. 신석정과 무명선사가 이에 대해 곧게 간하니 대흠무는 노해서 이 두 사람의 벼슬을 빼앗고 귀양을 보낸다. 태백산(백두산)으로 귀양을 간 신석정은 대원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그러자 신석정의 아들인 신사랑, 신사문, 신사경은 황제가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잠적한다.
대흠무는 대원의의 딸인 대귀령을 빈으로 맞아들이는데 다재다능한 절색이라서 그녀를 총애하게 된다. 국구가 된 대원의는 그 벼슬과 권세가 나날이 막강해진다.
당나라에서는 779년에 이예가 죽고 태자 이괄이 즉위하는데 이 사람이 곧 덕종이다. 그해에 발해에서는 대흠무와 고흔정 사이에 낳은 태자인 대굉림이 병사한다.
한편 산동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이정기는 장안을 위협하다가 악성 종양으로 781년에 갑자기 죽고 장남인 이납이 그를 계승해서 782년에 제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다.
발해에서는 대흠무의 병을 핑계로 도성을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술사와 신하들의 의견이 나오고 천도를 반대하는 의견도 나온다. 대흠무가 간쟁을 잘하는 주공신에게 물어보니 대원의가 동경 일대에 심복과 따르는 자들을 심어 놓고 터를 잡게 했으며 많은 양마와 양곡을 비축해 두었으니 역심을 품으면 방비할 수 없는 형상이고 황제 주변과 요직에 대원의의 심복들로 가득 차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간한다. 대흠무는 대노해서 천도 반대를 간한 세 명의 신하를 유배 보낸다.
대원의는 누이동생인 귀비 대술묘의 아들 대성진을 태자로 책봉하고 딸인 대귀령을 황후로 책봉하려고 한다. 대흠무의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자손을 볼 수 없으니 황자를 낳지 못하게 된 딸을 위해서 황후로 책봉하려던 것인데 이를 안 대술묘는 태자의 어머니인 자신이 황후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으면 대원의가 황후 고흔정을 독살한 것을 밝히겠다고 위협한다. 대술묘가 독살의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안 대원의는 귀비궁에 불을 놓아서 귀비와 궁녀들을 타 죽게 한다. 악행이 쌓여갔지만 대원의는 계속해서 대흠무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서 한왕 개국공이 되고 진단대장군의 작첩까지 받아서 인신(人臣)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었다.
대귀령은 한때 대흠무의 총애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른 후궁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옮긴 대흠무는 그녀를 도외시한다. 한창 외로움을 느끼던 대귀령은 우연히 궁궐을 호위하는 젋고 늠름한 금군 장수 양신장을 만나서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밀회를 거듭해서 임신까지 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후궁과 장수의 지위를 버리고 함께 잠적해서 아무리 그들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분노한 대흠무는 대원의의 왕호를 폐하고 범관(凡官)으로 삼는다.
대흠무는 동경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를 반대한 세 황자(대숭린, 대정한, 대청윤)는 상경에 남겨두고 천도한다. 천도한 지 6년이 지나서야 동경으로 오라는 칙서가 내려오는데 대성진을 태자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입궐을 막을지도 모르므로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라는 내용이 있어서 세 황자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에서 동경으로 가는데 이 칙서는 대원의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었다. 내시감이 세 황자가 병란을 일으킨 것으로 아뢰자 대흠무는 크게 놀라서 대원의를 토적군 통수로 삼아서 그들을 진압하게 한다. 대원의는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3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황자 대정한을 사살한다. 크게 놀란 대숭린과 대청윤은 군사 3백 기만 데리고 도망한다. 대원의는 이 공로로 3년 만에 왕호를 다시 받고 진단대장군을 겸하게 됐지만 대흠무는 그를 의심해서 군권을 넘겨주지는 않는다. 병고에 시달리던 대흠무는 792년에 병사한 아들, 대굉림의 아들이고 자신의 손자인 대화여를 태자로 책봉하고 대사면을 단행한다.
792년에 제나라 왕인 이납이 34세로 아버지인 이정기와 마찬가지로 악성 종양으로 죽는다. 그의 둘째 아들인 이사고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793년에 대흠무는 발해의 황제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인 56년간 재위하고 병사한다. 대흠무가 죽자마자 대원의는 정변을 일으켜서 대화여에게 강제로 미치게 하는 약을 먹여서 미치광이로 만들고 대원의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대흠무의 거짓 유조를 만들어서 황위에 오른다.
발해의 황제가 된 대원의는 미쳐버린 대화여를 별궁에 머물게 해서 그의 동태를 감시하는데 대화여를 돌보게 된 궁녀 나송옥은 여의관 오수지에게 대화여의 광증에 대해서 묻는다. 약을 잘못 먹으면 광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 해독약을 꾸준히 먹여서 광증을 낫게 하는데 남들에게는 늘 미쳐 있는 것으로 보이게 위장한다.
대원의의 죄상을 알고 정변을 일으킨 세 황자(대숭린, 대청윤, 대성진)를 비롯한 충신들은 정당한 명분 때문에 정변에 성공하여 불과 5개월간 제위에 올랐었던 대원의를 폐하고 대화여를 황제로 옹립한다. 대원의는 그가 총애하던 후궁인 대사루의 칼에 죽고 대사루는 단검으로 자살한다.
황제가 된 대화여는 강제로 투여한 독물 때문에 몸이 허약해져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는 후궁이 된 나송옥을 뭇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비(妃)로 봉한다. 그리고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서 동경에서 상경으로 다시 천도하게 된다. 대화여는 천도하고 나서 재위한 지 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794년에 죽으면서 제위를 대흠무의 둘째 아들이고 숙부인 대숭린에게 물려준다. 대숭린은 대화여의 아버지인 대굉림의 동생이다.
발해에 홍수와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청윤이 장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태 만에 진압되어 대청윤을 비롯한 반란의 수괴들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당나라에서는 황제 이괄이 805년에 죽고 태자 이송(순종)이 황위를 물려받지만 중풍이 심해서 환관들이 그를 태상황으로 밀어내고 태자 이순(헌종)을 같은 해에 황제로 옹립한다. 806년에는 제나라의 이사고가 할아버지인 이정기와 아버지인 이납처럼 악성 종양으로 죽는다. 이사고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왕위는 이복동생인 이사도에게 넘어간다.
대숭린은 제나라의 이사도와 해제동맹을 맺고 일본과는 해본동맹을 맺어서 당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다가 809년에 급환으로 죽는다. 재위기간은 15년이었다. 이에 대숭린의 장남인 대원유가 황위를 잇게 된다.
대원유는 식탐이 많아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대했다. 그의 동생인 대언의와 대명충도 그에 버금가게 비대했다. 그들의 어머니인 태후 오귀담은 그 성정이 질투가 심하고 표독했다. 오태후는 섭정을 하게 되고 준수한 용모에 무예가 뛰어난 장수 미사천을 태후의 시종으로 발탁해서 자신의 모사 겸 정부로 삼는다. 미사천은 물감옥을 만들게 해서 역모의 의심이 들면 그 물감옥에 가두어 간쟁을 잘하고 충직한 신하들의 지조를 꺾게 한다.
대원유와 그의 황후인 임사향은 황권을 쥐고 휘두르는 오태후를 보고 황권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태후를 죽이려고 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오태후는 황후 임사향을 폐해서 서인으로 삼고 대원유를 별궁으로 내쫓는다. 그 이듬해인 812년에 대원유는 별궁에서 모진 병이 들어 갑자기 죽는다. 허수아비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3년이었다.
오태후는 신하들이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는 상소를 올리게 해서 등극하려고 하는데 등극하려는 날에 대인수가 주모한 반란이 일어나서 등극을 포기하고 반란군의 뜻대로 대원유의 동생인 대언의가 황제로 등극한다. 대인수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이었다. 오태후는 서궁으로 유폐되고 오태후를 둘러싸고 정사를 그르치게 한 자들은 모두 징치한다. 대인수는 막강한 권세가 있는 벼슬을 사양하고 가산을 정리해서 도성 밖으로 거처를 옮긴다.
어머니에게 깊은 효심을 가지고 있었던 대언의는 서궁의 오태후를 자주 찾아서 문안을 드리고 미사천과 오태후의 막내 여동생인 오귀옥을 오태후의 곁에 있게 해서 오태후의 적적함을 달래 준다. 815년에 대언의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오태후는 대신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권지국사의 자리에 올라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다뤘다. 대원유 때에는 섭정을 했지만 이제는 온전히 황제처럼 재결하고 조서를 내려서 용상에 오르지 않았을 뿐, 황제나 다름없었다.
817년에 대언의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대언의는 자기가 죽으면 오태후가 황위에 오를까 봐 815년에 동생인 대명충에게 황위를 계위한다는 유조를 남겨서 황후 이채복에게 보관하게 하는데 이를 공개하자 대명충이 황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대명충도 중풍으로 쓰러진 적이 있어서 건강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오태후는 다시 섭정을 하게 된다.
오태후는 대언의의 황후였었던 이채복을 독살하고 대인수를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그를 죽이면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그를 죽이지는 못한다.
818년에 대명충도 죽는다. 재위 기간은 1년이었다. 탈옥한 대인수는 충신들의 주도하에 황제로 옹립되고 오태후를 효수경중(梟首警衆)하자는 상소가 빗발치지만 대인수는 오태후를 동경용원부로 귀양 보낸다. 오태후의 측근들은 변방으로 정배했다.
819년에 제나라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나라의 장수 유오는 이사도의 목을 베어 당군에 바치고 항복한다. 이사도가 재위한 지 13년 만이고 이정기가 치청 왕국을 세운 지 55년 만이었다.
대인수는 국내 정세가 혼란해서 제나라를 돕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친정을 하여 우선 달구, 철리, 흑수, 월희 등의 말갈 제부를 토평하여 그들이 국경을 침범해서 발해인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한 것을 꾸짖고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자들만 참하고 자비를 베풀어서 복속시킨다.
대인수는 732년에 대무예가 당나라의 등주와 영주를 친 것처럼 그로부터 92년 만인 824년에 등주와 영주를 치기로 한다. 을지후문이 발해만에서 당군과 치열한 해전을 벌여서 승리하고 상륙해서 등주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대인수가 대무예처럼 요서를 공격하여 승전하니 당의 황제 이항(목종)은 화의의 표시로 부여성 북방의 옛 거란 땅을 양도한다는 국서를 보내온다.
대인수는 신재용의 후손인 신작의 개혁 정책을 따라서 을사유신을 단행하는데 이로 인해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 진신과 사족들의 반발이 극심해지고 어쩔 수 없이 신작을 태백산으로 정배하게 된다. 태백산에는 신작의 제자들과 대인수의 심복들이 있어서 신작을 미워하는 세력이 그를 해치기 어렵기 때문에 태백산으로 정배한 것이다.
대인수는 신작을 태백산으로 정배한 지 2년 만에 제사를 지내고 신작도 만나 볼 겸 태백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태백산에 닿자마자 예전에 반란을 일으켰었던 대청윤의 아들인 대창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듣고 서둘러 제사를 지내고 나서 신작을 군사로 명하고 을지후문을 토평군 대총관으로 삼아 부월을 내린다.
반란군의 수가 더 많았지만 명분이 빈약했고 노비 출신의 비장 대도만덕이 노비와 부곡들을 이끌고 대활약을 하여 도성인 홀한성을 장악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대인수의 아들인 태자 대신덕을 살해한 후였다. 대창해는 난전 중에 피살되고 반란이 진압되자 대인수는 반란의 수괴들만 처벌하고 대도만덕을 장수로 삼았으며 신작은 태사로 봉하고 을지후문은 태복경 겸 진단대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을사유신을 더욱 강화하니 그토록 유신을 반대했던 대소신료들도 모두 침묵했다.
대인수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된다. 병중인 827년에 당나라의 이앙(문종)은 대인수를 위로하기 위해 사신 이숭선을 발해 도성으로 보냈다. 이숭선은 대인수에게 당 황제 이앙이 친필로 쓴 "해동성국(海東盛國) 대발해(
大渤海)"라는 휘호를 올린다. 대인수는 이숭선을 옥에 보름 동안 가두고 풀어주되 자신의 친필로 내린 "해서성국(
海西盛國) 대당(大唐)"이라는 휘호를 줘서 보내게 한다. 사신 이숭선을 옥에 가두라고 할 때 내시감 임산록이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황상의 쾌유를 기원하며 친필 휘호를 올렸는데 그런 사신을 옥에 가두면 예가 아니라고 말했다. 대인수는 말했다. "발해를 동쪽 바다의 나라라 칭함은 결국 우리를 멸시함이다. 당나라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가 동쪽 바닷가에서 융성한 나라를 가꾸었다는 뜻이 아니더냐? 짐이 당제 이앙에게
해서성국(
海西盛國) 대당(大唐)이라는 휘호를 보내면 곱게 두 손으로 받겠느냐?" 임산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민족에게는 소리글자인 가림토가 단군조선 때인 3천여 년 전부터 있었지만 38자나 돼서 백성들이 배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인수는 좀 더 배우기 쉬운 가림토를 만들라고 신작과 정음사의 학자들을 격려했다. 결국 23자로 줄여서 만든 가림토의 완성을 보고 나서 대인수는 830년에 숨을 거두었다.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는데 그가 다스린 기간이 발해의 최전성기였다. 백성들은 가림토를 배웠는데 이를 선문(宣文)이라고 불렀다. 대인수의 시호가 선황제인 탓도 있지만 이 글자를 선제의 큰 베풂(宣)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해에 대인수의 맏손자인 대이진이 계위했다. 대이진은 나이가 어린 데에다가 성품이 유약해서 정사에 어머니인 태후 해수련(대창해의 반란 때에 피살된 대신덕의 황후)의 간섭을 받았다. 결국 해태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대이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대내상에 대공정을 임명하고 내시감에는 사고로 남근이 잘린 해지량을 임명했는데 해지량은 해수련의 오라버니인 해수청의 아들, 즉 해수련의 조카였다. 해지량이 내시감이 되자 해지량의 사촌아우인 해무량은 해지량에게 염전이 많고 풍족한 염주의 자사 자리를 애걸해서 얻게 된다. 해무량은 염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는데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서 조정에서는 시어사 고덕술을 염주로 파견하는데 그가 외딴 섬 안에 숨겨 놓은 해무량의 재화들을 찾아내자 해무량은 그와 일행을 죽여서 해적들에 의해 몰살을 당한 것처럼 위장한다. 의심이 든 대이진은 신작의 권유대로 해씨 가문의 해동정을 어사로 다시 파견하지만 그는 강간을 당하려던 여인을 구해주고 오히려 강간범으로 몰려서 염주자사에게 끌려간다. 그는 염주자사 해무량의 의도대로 조정에 들어가서 해무량이 무고하다고 거짓 복명을 한다.
해무량은 동경용원부도독이 되는데 그곳에서 수탈이 심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해태후 일가의 폭정이 심하여 그들에 대한 원성이 반란으로 드러난 것이다. 해지량은 대이진에게 해태후를 폐해서 사가로 내쫓고 해지량과 해무량을 옥에 가두게 한 후에 신작을 불러서 동경성의 반란군의 주동자들을 홀한성으로 유인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거상(巨商)인 장사경과 율창직을 비롯한 반란의 주역들은 신작을 믿고 그를 따라 홀한성으로 들어가지만 금군들은 신작과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신작을 반란의 수괴로 발표하고 신작의 목을 도성의 남문 밖에 높이 매달아 효수경중한다.
그리고 선제가 선포했던 을사유신도 파하고 백성들이 즐겨 쓰던 선문도 관가에서는 사용을 금했다. 선제 대인수가 애써서 만들어 놓았던 좋은 제도와 문자가 애석하게도 바로 다음 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대이진의 황후 주신강은 보다못해 해태후의 생신 잔치에 자객을 보내서 암살하려고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사가로 내쫓기고 암살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참수된다.
해태후는 예전의 오태후와는 달리 정사를 잘 돌보고 황위를 탐내지 않았다. 대이진은 황제지만 한 번도 나라를 다스려보지 못하고 여색과 아편, 술과 가무, 격구와 사냥에 취해 혼몽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서 닷새 만에 죽는다. 857년이었고 재위 기간은 26년이었다. 제위는 대이진의 동생인 대건황이 계위한다.
해태후는 섭정을 계속하면서 황친들의 반발을 견제하기 위해 호사를 누리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나친 호사 때문에 관고를 걱정할 정도가 되자 해지량이 꾀를 내어 대웅선을 대내상으로 삼고 고문간을 대중정으로 삼아서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고 그 가산을 모두 적몰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게 하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탐관오리들이 숙청을 당하면서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군권을 쥐고 있는 금군대총관 해무량이었다. 내친 김에 호사하고 향락에 빠진 황친들을 숙청하자고 백관들이 진언하자 백성들이 황궁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호사하는 황친들을 숙청하자고 주장하는, 전례가 없는 시위를 벌인다. 해지량은 대건황에게 호사하는 황친들의 숙청은 해태후의 뜻이라고 말하는데 대건황은 이를 윤허한다. 황친 가운데에 호사하지 않거나 해태후의 총애를 받는 자들은 무사했지만 호사하고 방자한 황친들은 모두 식읍을 몰수하고 재물을 적몰했으며 그들을 추종하던 구신과 사족들의 재산도 적몰하고 죄를 물었다.
대건황의 후궁 선송지는 황권을 무시하는 해태후의 섭정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독살을 시도하지만 사전에 이를 안 해태후에 의해 독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건황은 선송지와 그의 일가들을 모두 피신시킨다.
도성에 역질이 돌자 신하들과 백성들은 역질이 만연한 서쪽 변경의 사병(私兵)들을 불러모은 해무량을 그 원흉으로 보고 해무량을 처단하라는 상소와 민심이 들끓었다. 해지량은 백성들의 봉기를 막으려면 해무량을 죽여야 한다고 아뢰니 해태후는 이를 윤허한다. 결국 해태후는 해무량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하는데 궁궐에 심어 놓은 간자에 의해 이를 안 해무량은 선수를 쳐서 자기가 먼저 해태후를 죽이려고 하지만 심복 중 한 명의 배신으로 심복들과 함께 목이 달아난다.
871년 봄에 대건황은 사냥을 나가서 좋아하는 사슴고기를 먹고 쓰러지는데 환궁해서 죽는다. 시신은 외관상으로도 독살을 당한 게 분명했다.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대건황의 아들인 태자 대현석이 계위한다.
태복경 고재정은 황제 대현석의 윤허를 받고 황친 대건진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서 해지량과 그의 심복인 임달선을 죽이고 해태후까지 죽이려고 하는데 의명선사가 해태후를 비구니로 만들어서 성각사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대현석은 진신소(搢紳疏)의 강요에 의해 해태후 대신 권지국사가 된 대건진의 섭정을 받아야 했으니 권력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 황권은 복권되지 않았다. 그 다음해에 성각사에서 해태후가 죽는다.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인 발해에서 황제의 권력보다 의명선사와 덕산대사의 덕망이 높아지자 섭정을 하던 대건진은 의명선사가 정진하는 법화사와 덕산대사가 정진하는 성각사를 불태워 없애려고 한다. 그들이 있는 한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에 덕산대사는 다른 승려와 불자들을 피신시키고 절에 불을 놓아서 절과 운명을 함께하고 의명선사는 역시 다른 승려와 불자들을 피신시키고 자신이 불에 타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절을 불태운다.
대인수 이후로 지금까지의 황제들은 대야발의 방계손(傍系孫)이었고 대건진은 대조영의 적손(嫡孫)이었으니 자신이 황실의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대건진은 의식하고 있었다.
대건진의 충복인 고재정은 자신이 황제가 되어 고구려의 왕족인 고씨가 집권하고 국명도 고구려로 고치려는 야심을 품고 정변을 일으키지만 심복인 장복사가 변심을 해서 정변은 실패로 끝나고 고재정은 처자를 죽이고 자결한다. 대건진은 정변을 진압한 장복사에게 군정(軍政)과 마정(馬政)을 맡기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허세일 뿐이었다. 심복이었던 고재정의 변심에 크게 놀란 대건진은 당나라처럼 감군(監軍) 제도를 시행했다. 감군이란 귄지국사의 명을 받은 장수가 각 군진과 변방을 감찰하고 권지국사에게 직보하는 것으로 권지국사가 군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 수 있었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서 황소가 6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니 황제 이현(희종)은 사천으로 달아나고 황소는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로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대건진의 월권을 보다못한 대현석의 황후 양아림은 장복사 등에게 황제의 거짓 밀지를 내려서 대현석이 대건진에게 양위를 하기로 한 날의 전날인, 대현석의 생신 연회에서 대건진을 포박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그를 옹립하려고 했던 측근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정배하거나 삭탈했다.
정사를 직접 돌보게 된 대현석은 군사들을 양성해서 외부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서 병석에 눕게 된다. 대현석은 후사를 대비해서 대위해를 태자로 책봉한다. 양아림은 태자인 맏아들 대위해가 남색을 즐기고 호사방탕하며 성정이 포악해서 황제의 그릇이 아니라고 보고 장복사를 불러서 둘째 아들인 대봉예가 기개가 있고 흉금이 넓으니 태자를 폐하고 대봉예를 태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장복사는 대위해의 지지세력이 많아서 또 다시 정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며 고심을 한다. 그 와중에 황후 양아림이 급사를 하고 이어서 황제를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위해는 장복사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죽이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도 모두 죽인다. 어머니인 양아림도 대위해가 사주하여 독살한 것이다.
대현석은 병석에 누운 지 7년 만인 894년에 죽는다. 재위 기간은 23년이었다. 대위해가 계위한다. 대위해는 후궁 오미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대한상을 태자로 책봉한다. 황후 오승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대인선은 기개가 없고 나약하며 문무를 두루 갖추지 못했고 도교를 숭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자로 책봉하지 않는다.
906년에 운칠현(雲七賢)은 황제가 황음무도하고 악정으로 백성들을 괴롭혀서 국기가 문란해졌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켜서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인 대인선을 옹립한다. 정변 중에 대위해와 태자인 대한상은 피살된다. 대위해의 재위 기간은 12년이었다. 대위해는 대원의처럼 폐위되어 사호와 묘호, 연호를 받지 못한다.
대인선은 운칠현 중의 한 사람이고 정변의 일등공신인 배정을 대내상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배정이 충역(忠逆: 충의와 반역)을 도모한 자를 중용하면 후일에 반드시 천하를 어지럽혀 훈공을 세워 득세할 자가 생긴다고 벼슬을 사양하며 대인선에게 해동청(海東靑: 참매) 한 마리를 바치고 도성을 떠난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은 884년에 평정됐지만 황소의 부하였었던 주전충이 득세하여 당의 황제 이축(애제)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양(梁)나라를 개국했다. 일개 비적 출신이었던 주전충은 개국의 도읍지를 자신의 근거지였던 변주로 정하고 개봉부(開封府)로 개칭했다. 당나라는 개국한 지 276년 만인 907년에 이렇게 멸망했다.
어느 날, 발해에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늘려서 강성해진 거란의 가한 야율아보기의 외숙(外叔)인 야율할저가 두 아들과 함께 투항을 한다. 그가 거란의 세작(細作)임을 간파한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은 장수들을 시켜서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야율할저를 죽이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그의 맏아들 한 사람만 죽이게 된다. 이 사실을 안 대인선은 대노해서 오소도와 대성악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참수한다. 야율할저가 등주에 가서 거란의 정세를 살펴보겠다고 청하니 대인선은 승낙한다. 그러나 야율할저와 그의 심복들은 가는 길에 발해의 호위 군사들을 모두 죽이고 거란으로 달아난다. 그때에는 이미 야율할저가 발해의 주요한 군사 기밀들을 상당히 알아 놓은 뒤였다.
처음에는 명민했었던 대인선은 날이 갈수록 혼군(昏君)에서 폭군(暴君)으로 변해갔다. 대인선은 야율할저에게 속아서 수많은 군사 기밀들을 빼앗기고 충신들을 죽인 것을 생각하니 울분이 치솟았다. 그러나 강성해진 거란을 쳐서 그를 붙잡아오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우매해서 고문하고 죽인 충신들의 악몽 때문에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발광하기 일쑤였고 자신을 칭송해도 겉과 속이 다르다고 참수하여 신하들은 모두 조아린 채 침묵을 지켜야 했다. 대인선은 철리 말갈의 대인 달고중의 딸인 달시화를 특히 총애했는데 어느 날 달시화가 주는, 환각 효과가 있는 호계주를 마시고 환각 증세 속에 달시화를 칼로 베어 죽인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말갈인들이 수령보다 더 받들어 모시는 도사 자양과 여도사 백화고를 죽여서 말갈족들의 원한을 샀다. 대인선이 황음하게 여색에 빠져 있을 때에는 궁궐이 조용했지만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에는 분별력을 잃은 미친 폭군이었다.
한편 거란에서는 야율아보기가 3년마다 교대로 가한이 되는 8부 대인들을 모두 불러서 죽이고 916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돌궐, 토혼, 소번, 사타 제부를 친정해서 승전하고 삭주 등을 점령한다. 그 무렵,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다.
대인선은 거란에 사신으로 안좌선을 보내는데 안좌선은 야율아보기를 알현하지도 못하고 박대만 받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 황제가 보낸 물선도 받지 않았다. 야율할저가 안좌선을 맞아들여 아들의 원수와 누대의 원한을 갚겠다며 머지않아 발해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안좌선은 야율아보기가 받지 않은 물선을 명마와 진귀한 보석 등으로 바꿔서 야율아보기가 답례로 보낸 물선으로 속이고 거란 황제는 거란 군사들이 발해 변경을 침노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며 훈공을 세우려는 장수들의 헛된 망상을 엄히 다스리겠으며 발해와 거란은 누대에 걸쳐 화친했듯 상호 호합(好合)하자고 말했다고 속인다. 사실대로 고하면 칙지를 받들지 못했다는 죄로 참수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인선은 안좌선에게 벼슬을 더해 청수대부로 삼고 후하게 사급(賜給)을 내려 진무(鎭撫)했다. 황궁을 나선 안좌선은 한숨을 쉬었다. 거란이 변경을 침노하는 순간 황제의 노여움이 폭발할 테고 행여라도 사신단 중에 입이 가벼운 자가 있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듬해 봄, 발해 변방에 거란군이 집결했다는 표문이 올라오자 안좌선은 가솔을 데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 무렵에 왕건은 송악(개경: 지금의 개성)으로 천도하고 북쪽 지경을 점차 넓혀 발해를 은근히 핍박하던 때였다. 고려는 남쪽의 신라와 견훤의 백제를 핍박하고 북으로는 발해를 넘보기 시작했다.
대인선이 순람할 때에 폭정을 휘두른 비사성에서부터 반란이 일어나고 이어서 불열에서 숭앙하는 여도사 백화고를 죽인 일로 말갈인들의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 불열을 이끄는 자는 달시화의 아버지인 달고중이었다. 태백산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의 후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성난 민심이 반란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나라가 망할 명확한 조짐이었다. 민심은 폭군에게서 멀어졌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양나라의 유주와 탁주를 함락하여 기세를 드높였다. 그러나 대인선은 주색에 빠져 흥청망청할 뿐이었다. 대인선은 술수를 써서 아들의 후궁인 며느리 고명희를 폐해서 사가로 내쫓은 뒤에 별궁으로 불러서 정사를 즐긴다. 대인선이 별궁에서 고명희와 주색에 빠져 있을 때에 경천동지할 급보가 날아든다. 적손인 황친 대진해와 대선덕이 금군 대총관 신주필을 앞세워 황궁을 점령하고 도성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거란에 사신으로 가던 황자 대광천이 급거 환궁해서 별궁으로 진병하기 위해 군사를 점고한다는 소식에 더욱 경악했다. 급박한 반란의 와중에 대진해와 대광천이 피살되면서 황실의 반란은 진압된다. 대인선이 전국각지의 반란군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려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두 사면하고 거느리는 백성과 군사의 규모에 걸맞게 각기 벼슬을 내리니 반란 진영에서 황명을 받들겠다는 표문이 속속 올라왔다.
한편 사타족으로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이극용의 아들인 이존욱은 923년에 나라 이름을 진(晉)에서 당(唐)으로 바꾸었다. 비록 이민족이었지만 멸망한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지였다. 역사는 이를 후당(後唐)이라고 부른다. 그해에 이존욱은 개봉을 기습해서 양나라를 멸망시킨다. 대인선은 황자 대우모를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는데 후당의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온 대우모는 거란의 요충지인 요주를 깨뜨리면 거란이 발해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후당과 거란에서 각각 사신을 보내와서 동맹을 청하며 승전하면 적국의 영토를 반분해서 가지자고 하니 조정의 공론은 해당파와 해란파로 나뉘어져서 들끓게 된다.
대인선은 아끼는 조카 대원양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 이존욱의 청을 받아들여 거란을 공격하겠다는 국서를 전한다. 그리고 군사를 일으켜서 거란의 요충지인 요주를 공격해서 격전 끝에 점령한다. 약속한대로 후당의 증원군이 오면 발해 황제의 친정군을 몰고 와서 거란을 치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후당에서는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속은 것을 안 대인선은 대노한다. 발해군은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후당은 사실상 거란을 공격할 군사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인선은 중풍으로 쓰러져서 병석에 눕게 된다. 대인선은 거란과 싸우기 전에 북방과 동방의 말갈 반란군들을 토평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복수심에 불탄 말갈군의 맹공으로 참패한 토벌군은 남진하여 고려에 투항한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수들을 참수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925년 섣달에 거란에서는 발해 정복을 위해 야율아보기가 친정군을 이끌고 몰려와서 부여부를 포위하고 맹공을 시작한다.
그 무렵, 혼암한 황제를 방벌(放伐)하고 태자였었던 대광현을 옹립하기로 한 반란군은 도성으로 진격하다가 거란군의 기습으로 부여부가 포위됐다는 급보를 받자 어디부터 갈지 의견이 분분해진다. 그러나 부여성은 포위된 지 불과 사흘 만에 함락됐고 부여부도독 고황경은 장렬하게 전사했고 수많은 군사들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부여성이 함락된 것을 알게 되자 비로소 대인선은 성문을 열고 대광현의 군사를 받아들여서 대광현을 태자로 복위시킨다.
숱한 내홍을 겪은 나라의, 사기가 위축된 3만여 명의 발해군은 겨울 전투에 능하고 눈 덮인 벌과 얼어붙은 강을 거침없이 진격하며 연전연승하여 사기충천한 20만 명의 거란 주력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발해군은 야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항복한 군사들마저 도륙을 당했다. 대인선은 태자 대광현에게 용맹하고 날렵한 군사를 주어 고려의 개경으로 달려가라고 명했다.
홀한성은 대광현이 망명차 고려로 떠난 지 두 식경이 채 되지 않아 거란군에 포위되어 밤낮없이 맹공을 당한 지 사흘 만에 비루한 삶을 택한 군사와 백성들이 황제 대인선을 칼로 위협하여 항복문을 쓰게 했다.
"항복하면 목숨이 붙어 있을 것 같은가?"
황제 곁을 지키던 배구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운칠현의 한 사람인 배정의 아들이었다. 순간 곁에 있던 장수가 강직한 충신의 목을 베었다.
야율아보기는 태자 야율배에게 입성하는 즉시 국서고를 불태우고 사탑을 헐어 사리를 찾고 사내는 다 죽여 씨를 말리고 여인들은 전리품으로 모두 나눠주라고 명했다. 그리고 발해의 황제와 황자들은 거란으로 압송했다. 결국 대인선은 운칠현이 정변을 일으켜서 황제가 된 지 20년 만에 폐위되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지 228년 만에 발해는 멸망하고 만다.
926년 정월, 야율아보기는 궁성으로 들어와 말 아래 엎드린 발해 황제 대인선을 모질게 끌고 성문을 나섰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는데, 허공에서 해동청 두 마리가 바람과 눈발을 가르며 야율아보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대원수 야율요골이 휘두른 칼날에 참매 한 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참매 한 마리는 야율아보기의 됫머리 쪽 오목한 풍지혈(風池穴)을 모질게 쪼고 창공으로 한껏 날아올라갔다. 눈에 익은 참매의 몸짓이 날렵했다. 예부터 풍지혈을 다치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땅바닥에 나뒹군 매의 목에는 금실로 엮어 만든 줄이 매여 있었다.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몹시 아끼던 사냥매였다.
대인선은 바등거리다가 사지를 쪽 뻗은 해동청을 쓰다듬었다. 참매는 숨이 멎었다.
마치 발해처럼.
줄거리를 최대한 간략하게 줄이려고 했지만 쓰다 보니 꽤 긴 글이 됐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드넓은 만주 벌판은 더 이상 한민족이 주류가 되지 못했고 한민족의 세력은 반도 안으로 위축되었다. 발해의 멸망 원인을 백두산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상정하는 설도 있지만 그 대지진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전제 국가에서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나라의 군주에 달려 있는 게 지배적이다. 대인선의 광기 어린 폭정이 나라를 사분오열시키고 전국 각지에 내란이 일어나게 하고 군심과 민심을 잃었는데 이웃나라인 거란이 갑자기 세력이 급격히 융성해지니 침략을 당하고 멸망하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을 밟아서 잔학한 정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발해는 대인선의 폭정이 극도로 심해지기 전에 좀 더 일찍이 정변을 일으켜서 영명한 군주를 옹립했어야 했다. 그래서 민심을 다독이고 군사를 늘리고 열심히 훈련시켜서 변방을 굳게 지키고 군주가 간신들을 내치고 주색을 멀리 하고 정사를 세심하게 돌봐서 자애롭게 백성들을 다스렸다면 거란이 강성해졌다고는 해도 멸망의 비운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을 하고 가정을 하고 복기를 해야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긴박한 상황에 놓인 그 당시의 중요한 인물들이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겠지만 그런 긴박한 상황에 몰리지 않게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만주를 잃은 만큼 그 후의 힌민족의 국력은 쇠퇴한다. 그 후로 동아시아에서 몽골족에 이어 한족과 여진족, 일본족의 발흥이 이어지는데 고려와 조선, 그리고 지금의 남북한은 저항을 해 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약세를 보존하는 것만으로 자족하며 살아와야 했다.
만주를 지배한 나라들 중에서 고구려와 발해는 몽골, 여진, 돌궐, 거란에 비해서는 세계사에서 인지도가 많이 낮은 것 같다. 활동 무대가 만주 일대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고구려나 발해가 전성기였을 때에 그들도 중원을 공격하고 점령해서 지배했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 적이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기에 이민족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강성할 때 오히려 공격해서 속국이 되느니 타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게 백번 나을 텐데 나라의 역량이나 조건이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위업을 달성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크다. 아주 오래 된 과거지사지만 고구려와 발해에서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지금 남한의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주변 국가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왜소해진 상황이다. 그래서 자주적이 아닌 종속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현실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게 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그 냉엄한 국제적 현실 이상으로 사대주의적이고 종속적인 사고방식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안이한 시야는 위험을 불러오고 위험을 인지하고 대비하는 시야는 편안을 불러온다.
나는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이나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나라가 두 번이나 망하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그 비극은 결국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내분이 자주 일어나고 강한 지도력이 없을 때에 더 빠르고 심각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경제력이 일부 계층에 지나치게 편중되고 집중돼 있어서 비인간적인 빈곤이 극심하게 방치돼 있고 그 현상이 확산되며 극악한 불평등이 물신 숭배 풍조 속에서 당연시될 때 그 국가와 사회는 응집력을 잃고 혼탁해지게 된다.
고구려도 망했고 발해도 망했다. 그리고 자국의 사서는 모두 불태워져서 타국의 사서에서나 그 역사의 불투명한 편린들을 아주 조금씩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타국이나 망국의 역사를 다른 나라와 승전국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관(史觀)은 국수주의적인 취향과 승전국으로서의 입김이 짙게 배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발해는 그 영광을 유추해 볼 만한 웅혼한 자취가 지금까지도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열 권의 책은 허구가 가미되어 깊은 감동 속에서도 읽는 재미를 추구하고 있으며 발해의 역대 황조들의 치적과 성쇠, 군사와 백성들의 진솔한 삶을 세밀히 살펴볼 수 있고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회한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발해는 만주에서 한민족이 만든 마지막 국가라는 점에서 그 흥망성쇠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 잃은 한과 애끓는 복국(復國)에의 의지는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말갈인들과 함께 가열차게 일어나서 발흥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발해를 망하게 만든 거란과의 싸움에서 굴복하지 않고 승리를 거둬서 오히려 영토를 넓히고 국위를 떨쳤다.
고구려와 발해는 비록 망해서 없어졌지만 그 역사와 정신은 한민족의 얼과 유전인자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일배와 민족 반역자가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머지않아 청산(淸算)될 것이라고 낙관하며 언젠가는 올바른 세상이 올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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