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스포] 뭔가 강렬한(?) 맛의 <지구식 구원자 전형>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우주적 존재에 의해 지구의 사망판정이 내려지고 

죽기 싫은 지구는 구원자를 찾고자 한다, 뭐 그렇게 시작되는 소설입니다.

현대지구배경의 아포칼립스형 레이드물과 비슷합니다.

지구 전체에 거대한 재앙이 찾아오고, 생존자들은 극한상황에 내몰리고, 

주인공은 뭔가 치트나 기타 우위를 얻어서 선두로 치고 나가고, 

좁은 범위부터 시작해서 차츰 맵이 개방되면서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스케일이 커져가는...

기본틀은 그런 식입니다. 별 차이 없죠.

결정적인 차이점은 구원자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구원자는 포인트를 모아서 강해질 수 있고, 

이 포인트는 모든 생물(인간, 동물 포함)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포인트를 넘기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구원자가 포인트를 모으면 모을수록 '구원'의 가능성은 커지는데 

그러려면 다 죽이고 포인트를 먹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계의 존재가 포인트를 먹으면 영원히 소실되기 때문에 

지구의 포인트총량이 줄어들고, 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결론은 이계의 존재들이 죽이기 전에 

구원자가 먼저 다 죽여서 포인트를 싹쓸이해야 한다는 거죠.

동물도 포인트가 있기는 하지만, 포인트 수입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인간입니다.

즉 '지구'를 구하려면 '인류'를 학살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이 구원자 후보 중의 하나입니다.

지구를 구원하고, 또 본인도 살아남기 위해서 학살을 해야만 하는 처지죠.

작품 내에서 주인공을 '책임감 있는 미친놈'이라고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묘사예요.

지구를 살린다는 무겁기 그지없는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광기가 필요합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대량학살로 포인트를 긁어모아야 하니까요.

주인공이 바로 그 책임을 아주 훌륭하게 짊어지는 놈입니다. 

<지구식 구원자 전형>은 주인공이 인간백정처럼 학살을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죄 있는 인간도, 죄 없는 인간도, 주인공 앞에서는 공평하게 포인트로 환산됩니다.

오로지 인류생존에 공헌할 것으로 판단되는 극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죠.

주인공은 구원의 책임을 아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래서 극단적인 행위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릅니다. 

그런 탓에 이 작품은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속이 거북해지는 장면이 종종 나오거든요.

아포칼립스라고 말은 하지만 항상 치트를 얻어서 여유 펑펑 부리며 

아무리 부조리하고 구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기적을 일궈내며 

해피엔딩을 양산하는 대다수 작품들과는 달리 

<지구식 구원자 전형>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잔혹하지만 당연한 논리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도 가끔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피자 막 먹다가 느끼하면 집어먹는 피클처럼 

달달한 양판에 쩔어버린 제 뇌를 쌉쌀한 맛으로 씻어주는 느낌이랄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