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회고록 개정증보판 전 5권

 1985년 초판 발행 당시에 공식적으로 6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었고 비공식적으로 출판된 해적판까지 더하면 수백만부가 팔렸으리라고 추정되는,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한 고발서다.

 초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돼 있지만 2009년에 재발매된 개정증보판에는 초판을 개정해서 전 4권으로 만들고 제 5권은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이라는 부제를 달아서 김형욱 납치 살해 사건의 진상 규명과 그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이 심했었던 한국의 정치사를 간략하게 재조명하는, 김경재의 뒷조사와 정치관, 한국사를 되돌아보는 감회가 담담하게 서술돼 있다.

 1942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성장한 김경재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다가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펜실베니아의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과정을 공부하게 된다.

 한편, 김형욱은 6년여를 재직한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된 소외감과 함께 인간적, 정치적으로 호감을 가지게 된 김대중의 대선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대 준 일과 기업인들의 돈을 갈취해서 자신과 부하들의 재산 축적과 유흥비 등에 쓴 일 등을 빙자해서 숙청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가 점점 더 뚜렷하게 다가오는 신변의 위협을 절감해서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권력의 유혹과 독재 정권의 억압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진 그는 자신의 회고록을 대필해 줄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김경재를 적임자로 여기고 선택해서 김경재에게 자신의 진술을 녹취하도록 해서 그 당시 박정희 정권 제일의 배신자이자 공적으로 급격히 떠오르게 된다.

 그가 장기간 재직했었던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된 이유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강경한 독재 정치를 내심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었던 그의 정치적 견해가 3선 개헌과 유신 개헌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강경하고 폭압적인 노선과 상충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4 19 혁명으로 승격한 4 19 의거가 일어나기 전부터 자칭 혁명을 계획해 왔었으나 4 19로 인해 중도에 포기하게 되고 그 1년 후인 1961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위와 장면 정권의 무능을 명분으로 지금은 쿠데타로 격하된 5 16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우선 기록돼 있다.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일본군 장교로 임관되어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 초급 지휘관으로 지내던 일제 시절부터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하여 주변의 동료들이 체포되자 동료들을 밀고하여 살아남게 된 자유당 시절, 이 때문에 예편하였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게 되고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한 정계의 권모술수가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김형욱은 김종필 등과 함께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혁명 모의 세력의 주류가 되어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그 후에는 2년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부를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치러서 윤보선과 대결한 박정희가 29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하여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역시 윤보선과 대결한 1967년 대선에서도 근소한 우세로 당선한 박정희는 집권욕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에 의해 삼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개헌하여 3선까지 연임이 가능하게 만든 3선 개헌을,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에 여당 의원들만이 소집된 가운데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이 통과된 후인 1971년의 대선에서 김대중과 대결하여 역시 근소한 우세로,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북 출신으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던 김형욱은 처음에는 3선 개헌을 반대했었지만 결국 박정희의 뜻에 따라서 3선 개헌 작업에 협조하게 된다.

 김형욱은 1963년 7월부터 3선 개헌 직후인 1969년 10월까지 6년 3개월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고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1971년 7월부터 제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72년 10월 17일, 유신 개헌에 의한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자 마침내 야인이 되고 만다.

 김형욱이 야인이 되고 나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인 1973년 8월, 일본으로 망명해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던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김대중은 구타를 당하고 결박된 상태에서 바다에 수장되기 직전에 배 위의, 일본 주재 미군 정보당국의 정찰기로 추정되는 비행기에서 그를 죽이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어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그의 집으로 인도되어 결국 연금 상태가 된다. 이때, 김형욱이 김대중 납치를 인지하고 과거 중앙정보부 재직 당시에 친했었던 부하의 도움을 받아서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었다는 회고도 담겨 있다. 김경재는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를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주모자로 알려진 그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해임하지 않는 등 정황상의 증거와 심증으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주범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형욱은 가족들을 미리 외국으로 도피시켜 놓고 1973년 4월, 대만에서 주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간다는 구실로 출국하여 대만에서 귀국하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었던 미국 망명을 결행한다. 

 김형욱은 미국에서 김경재와 박사월이라는 가명으로 회고록을 출판하는 계약을 맺고 박정희 시대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구술해서 녹취하게 하여 구술을 끝낸 후에 박정희의 끈질긴 회유와 귀국 종용을 뿌리치고 1977년 6월 22일, 미 의회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한국의 독재 정치 상황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증언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 몰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지시해서 미인계로 김형욱을 프랑스 파리로 유인해서 이중간첩 조용박으로 하여금 김형욱의 목을 부러뜨린 후에 양계장의 해머밀에 김형욱의 시신을 집어넣어서 잘게 분쇄하여 닭들의 사료로 제공하여 시신을 없애 증거를 인멸하는 완전범죄를 획책했다는 게 여러가지 김형욱 암살설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고 설득력이 있는 설이라고 필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머밀에 의한 시신 분쇄는 미국 영화 '파고'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기억한다면 그 잔혹한 시신 처리 장면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김형욱이 박정희를 단적으로 표현한 마키아벨리스트(권력지상주의자)라는 말에 절대 공감하면서 몇 달에 걸쳐 나눠 읽은 전 5권의 독서를 마쳤다.

 자신도 대통령 간접선거제(7년 단임제) 개헌의 국민 투표를 실시했었던 1980년 10월 22일, 이 개헌이 민주주의의 확립에 역행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전국민을 교묘하고 강압적으로 억압하고 세뇌하고 있던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치러진 투표에서 그 분위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비겁하게도 찬성하고 말았음을 이 자리를 빌어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나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지각 있는 국민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마음으로 투표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사악한 정권의 폭압에 대한 국민들의 정신적 항복에 다름 아니었다.

 독후감은 이것으로 마치고 여기에 김형욱 회고록의 중요한 부분들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세 부분인데 이 방대한 분량의 요점을 짚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서 여기에 소개해 본다.

 세상의 어떤 권력가, 어떤 독재자치고 민중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는 자가 없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권력안보와 상치될 때 그들은 다만 민중의 사랑을 버리고 자신들의 권력안보를 택하는 것뿐이다. 비극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나는 바로 내 자신이 그러한 비극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자각하고 있었다. - 3선 개헌에 대해 그 옳지 못함을 알고 독재자가 되고 있는 박정희에게 받은 권력에 대한 미련과 갈등을 서술한 대목.

 아무튼 그 법의 통과로 박정희는 그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고, 경제 규제를 명령할 수 있고, 국가 동원령을 선포하여 아무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옥외 집회와 언론과 출판을 규제하는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고,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할 수 있고, 군사상 목적으로 국가 예산의 항목과 내역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가진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규정하면 이는 표현이 좀 과장된 다분히 정치적 공격을 위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한 비상대권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면 에누리 없는 독재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언젠가 박정희는 유진산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협박한 적이 있었다.

 " 여보, 유진산 선생. 이승만 박사는 학생 200 명이 죽으니 겁이 나서 대통령을 물러났소. 내 똑똑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학생이 2만 명이 죽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이 점은 진산 선생의 오해 없기를 바라오." 

 당시 유진산은 하도 겁에 질려서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고 타계하기 얼마 전에 자신의 일생을 회억하는 병석에서 누군가에게 이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학생 2만 명이 아니라 국민 20만 명이 죽어도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미 1971년말부터 단단히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1971년 12월 27일 새벽에 비상사태하에서 시행한, 박정희에게 광범위한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 제정에 대한 김형욱의 소회.

 우선 박정희는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토론 없이 대통령으로 재선되고 심지어 10선도 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그는 명목뿐인 국회가 그래도 못 미더워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자신이 임명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란 의장인 박정희의 결정을 무조건 추인하는 고무도장에 불과하다. 그는 사법부의 장인 대법원장, 대법관 및 감사원장을 임명할 수 있다. 그래도 국회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언제든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비상조치권을 발동해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는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그는 국민을 영장 없이 체포, 가택을 수색할 수 있고 구속 기간을 무제한으로 연장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관선 변호사만 세워두고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 누구에게든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언도할 수 있다. 그는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헌법을 개정할 수 있고, 만일 국회가 자신에게 불리한 개헌안을 추진할 경우 이를 자신의 허수아비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폐기시킬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유신헌법 아래에서는 박정희에게 불리한 개헌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고 오직 박정희에게 보다 유리한 개헌만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만들었다. 그는 심지어 누가 개헌하자는 말을 한마디만 해도 그 사람을 법정에 세워 15년 징역을 언도할 수 있고, 누가 한마디만 자신을 비판해도 그 사람에게 역시 15년 징역을 때릴 수 있다. 그는 언필칭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제 군주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는 그다지도 비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인 폭거를 감행함으로써 한국사의 정통성을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고야 말았다.

 박정희가 자행한 그런 폭거는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고문이라는 이름의 절대 폭력과 자신이 5000년의 한국 역사에서 제일가는 지도자라는 절대 독선을 두 바퀴로 한 정치적 발작극이자 정치적 간(肝), 즉 정치적 양심이 굳어버린 간경화 증상의 하나였다. 여기서 절대 폭력과 함께 절대 독선이란 흡사 야누스의 머리처럼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머리이자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현상의 내부에 숨어 있는 비밀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박정희가 감추고 있는 국민에 대한 처절한 공포심이다. - 유신 개헌을 바라보는 김형욱의 소회.